“못된 자식에 유산 못 줘” 자필 유언장 남겨도… ‘유류분’ 내세우며 불효자는 웃는다

입력 2015-11-08 21:13
“내가 죽더라도 오빠와 남동생에게 한 푼도 빼앗겨선 안 된다.”

A씨(여)는 2012년 세상을 떠나기 전 딸 B씨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 오랫동안 병시중을 들며 자신을 돌봐준 딸에게만 재산을 물려주고 싶었다. 장남에 대해선 “말도 없이 이민을 떠난, 부모에게 관심이 없는 아들”이라 했고, 차남에게는 “내가 가진 유일한 건물을 가압류했다”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A씨는 증인 2명이 참관한 자리에서 ‘딸에게 전 재산(약 36억원)을 물려준다’는 유언장을 작성한 뒤 숨졌다.

그러나 A씨의 바람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장남은 2013년 12월 “내 몫의 유산을 내놓으라”며 여동생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어머니가 의사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유언장을 썼으며, 설령 유언장의 효력이 있더라도 자신의 ‘유류분(遺留分)’이 침해됐다는 거였다. 유류분은 법으로 규정된 최소한의 상속지분을 말한다.

장남의 주장은 법원에서 일부 받아들여졌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7부(부장판사 김진현)는 장남이 제기한 유류분 반환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로 판결했다고 8일 밝혔다. 재판부는 “A씨가 본인 뜻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한 것이 맞다”며 유언장의 효력은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B씨는 상속받은 부동산 지분 일부를 장남에게 양도하라”고 선고했다. 우리 민법이 유언장보다 ‘유류분 반환청구권’을 우선 인정하기 때문이다.

유류분 반환청구권은 상속 과정에서 가정 내 약자가 소외되는 것을 막자는 취지로 1977년 도입됐다. 당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에 따라 장남이 전 재산을 물려받거나, 조강지처 대신 후처(後妻)가 유산을 가져가는 폐단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법 1112조는 직계비속과 배우자의 유류분으로 법정 상속액의 2분의 1을, 직계존속과 형제자매의 경우 3분의 1을 인정하고 있다.

최근 법조계 안팎에선 이 제도가 시대에 맞지 않고 불합리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시대가 바뀌어 상속 과정에 차남·딸 등이 소외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졌고, 고령화 세태에서 부모가 불효(不孝)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으려 해도 사실상 그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가 사회에 환원한 재산을 자녀들이 유류분 소송을 통해 도로 가져가는 사례도 있다. 고(故) 허영섭 녹십자 회장은 2009년 “녹십자홀딩스 주식 56만주 등 재산 일부를 탈북자 사회복지재단 등에 나눠 기부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그러나 장남인 허성수 녹십자 전 부사장은 복지재단을 상대로 유류분 반환 청구소송을 냈고, 재단은 주식 일부를 돌려줘야 했다.

유산을 둘러싼 가족 간 법정 다툼은 매년 증가세다. 유류분 반환 청구소송은 2005년 158건에서 2010년 452건으로 늘었고, 지난해는 811건을 기록했다. 10년 새 5배 이상 늘었다. 서울의 한 판사는 “고인 뜻이 담긴 유언장보다 유족의 유류분 권리를 우선시하는 현행 법 제도는 불합리한 측면이 많다”며 “시대에 맞게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