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국 목사 “이산가족 모두 만나려면 300년 걸려… 통일, 결국은 하나님이 이뤄주실 것”

입력 2015-11-08 20:21
김병국 목사가 지난 4일 충남 천안의 자택에서 아버지인 월강 김관제 선생이 남과 북에서 애국열사로 인정받은 ‘훈장증’과 ‘렬사증’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천안=전호광 인턴기자
김병국 목사 부부와 북한의 조카들이 지난달 24일 북한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제2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병국 목사 제공
“아이고 산 구석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늙은이한테 무슨 얘길 들을 게 있다고.”

충남 천안 시내에서 차량으로 30분 가까이 굽이굽이 길을 지나 김병국(78) 목사의 집 앞에 도착하자 허리 높이의 낮은 울타리 너머로 김 목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목사는 지난달 24일부터 사흘 동안 금강산호텔에서 진행된 ‘제2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목소리나 표정에선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난 감격보다 아쉬움과 허탈함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1989년부터 상봉 신청을 했으니 딱 26년 만이네요. 이번에 경쟁률이 663대 1인가 했다고 하대요. 그런데 뵙고 싶었던 형님들을 못 봬서….”

김 목사는 상봉 일주일 전 ‘한국전쟁 때 헤어진 형님 세 분(동찬·병렬·병욱)이 모두 돌아가셨다’는 통보와 함께 ‘조카 두 명을 만날 수 있는데 참석하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충격과 아픔이 컸지만 조카들도 혈육인데다 26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수락했다.

하지만 형님들과 헤어진 65년 세월은 너무 길었다. “형님들 얼굴도 기억 속에 가물가물한데 조카들은 난생처음 보잖아요. 형님들하고 닮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래도 ‘삼촌’ ‘삼촌’ 하고 부르니 반갑긴 하던데 생각보다는 담담합디다.”

김 목사는 당뇨에 전립선염, 관절염 등을 앓고 있어 불편한 몸이지만 조카들을 위해 바리바리 선물을 싸갔다. 내복 양말 면도기 화장품 설탕에 성경책까지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챙겼지만 마음에 족할 리 없었다. 성경책을 전해주지 못한 것도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날씨가 추워 얼굴도 손도 다 텄는데 하나도 안 춥다고, 설탕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아는데 지도자가 잘 챙겨줘 풍족하니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받아갈 때는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에 짠하더라고요. 양강도 혜산시 백두산 아랫자락에 산다고 하던데 오리털 점퍼라도 몇 개 더 챙겨올 걸, 왜 그 생각을 못 했나 내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고요. 그래도 가장 안타까운 건 제한품목으로 분류돼 성경책을 전해주지 못한 것이지요.(한숨)”

김 목사가 받은 선물은 없었을까. 그의 답변은 간단했다. “북한 전통 술이라며 세 병을 주더군요. 삼촌이 목사인데.(웃음) 그래도 어쩌겠어요. 고맙다고 받았지요.”

대신 “술 세 병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큰 선물을 하나 더 받았다”며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항일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월강(月岡) 김관제 선생이 1971년 김일성으로부터 받은 ‘애국렬사증’이었다. 조카들이 상봉행사장에 챙겨 온 것을 촬영한 사진이었다.

김관제 선생은 국권침탈 후 만주로 건너가 박은식 신채호 선생과 함께 구국 계몽활동을 펼친 공로로 1990년 한국정부에서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수시로 고국 땅을 밟았던 김 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대동청년단’의 일원으로 고향인 경남 고성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아버지께서는 온 가족이 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게 하셨지요. 저희들에게 몰래 한글을 가르쳐 일본 순사들에게 잡혀가기 일쑤였습니다. 제가 학교에 가면 일본인 교장이 불러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하교할 때까지 벌을 세웠어요.”

굴곡진 가족사를 이야기하는 동안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김 목사가 틀어 둔 케이블 TV 음악채널에선 모차르트의 레퀴엠 D단조 ‘라크리모사(Lacrimosa·눈물과 한탄의 날)’가 흘러나왔다.

김 목사는 “형님들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북한 당국이 아버지의 항일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기뻤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은 소박했다. 그는 “지금 같은 방식으로 이산가족들이 모두 만나려면 300년은 걸릴 것”이라며 “고령의 이산가족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과 북이 서로 한 발씩 양보해서 금강산이든 어디든 매일 가족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제 어서 통일을 해야지요. 하지만 통일은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거지요. 통일이 되면 북녘 동포들과 손잡고 기도할 수 있는 교회 하나랑 비닐하우스 하나 지어서 함께 농사지으며 살고 싶네요.”천안=최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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