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스펙 쌓았더니 경력 요구… 취준생, 인턴도 필수?

입력 2015-11-08 21:00

대학 졸업반 김모(24·여)씨는 지난달 서울의 한 대학교 교직원 신입공채에 지원했다. 평점 4점이 넘는 높은 학점에 유창한 영어와 중국어 실력, 각종 컴퓨터 자격증까지 갖출 건 다 갖췄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서류전형에서 탈락해 면접조차 볼 수 없었다.

인터넷 취업 커뮤니티에 올라온 합격자들 면면을 살펴보니 문제는 바로 ‘경력’이었다. 경력을 연봉에 반영하지 않는 신입 공채인데도 합격자 대부분이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1, 2년씩 재직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취업준비생 전모(28)씨는 지난 8월 하반기 기업 공채를 앞두고 채용공고를 살피다 한숨만 나왔다. 응시하려던 외국계 IT 기업이 경력직 채용공고만 냈기 때문이다. 전공인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지원 자격이 안돼 서류조차 낼 수 없었다. 전씨는 “경력직만 뽑으면 나 같은 취업준비생은 대체 어디서 경력을 쌓느냐”고 말했다.

신입 대신 경력자를 선호하는 기업이 갈수록 늘고 있어 경력 없는 대졸자 등 취업준비생들이 울상이다. 경력이 없는 취업준비생은 그만큼 취업이 어려워지고, 동시에 원하는 직장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경력을 쌓을 기회도 줄어든다는 의미가 된다.

‘경력 선호’ 현상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100인 이상 기업 377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5년 신규인력 채용 동태 및 전망 조사’에서 올해 경력직 채용 비율은 27.1%로 추정됐다. 2009년 17.3%에서 지난해 25.2%로 대폭 증가한 수치가 올해 더 늘 것으로 예상된다. 그만큼 경력 없는 취업준비생은 구직 기회가 줄어드는 셈이다.

기업은 ‘즉시 전력’을 구하거나 교육비용 절감을 위해 경력직 채용에 나선다. 경총 관계자는 “신입직원에 비해 재교육과 훈련에 드는 비용이 적고 즉시 실무에 투입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경력직을 선호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평생직장 관념이 희석되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하는 신입직원보다는 바로 일할 수 있는 경력직을 채용하는 풍토가 자리 잡아가고 있다”고 했다.

신입사원 채용에서 경력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취업정보업체 잡코리아가 지난 3일 기업 인사담당자 238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신입사원 채용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격요건(복수응답)으로 ‘경력 사항’을 꼽은 응답자(42.9%)가 가장 많았다. 전공(29.4%)이나 연령(25.2%)을 크게 앞섰다. 자기소개서에 ‘경력 사항을 1000자로 기술하라’ 등의 주문을 하는 경우도 많다.

취업 재수생 허모(27)씨는 지난해 취업시장에서 ‘전패’했다. 대부분 서류전형도 넘지 못했다. 적을 내용이 없어 빈칸으로 낸 자기소개서 ‘경력 사항’란이 문제라고 여겼다. 그는 지난 2월부터 6개월간 한 홍보대행사에서 법정 최저 시급만 받으며 허드렛일을 했다.

그렇게 인턴 수료증을 받고나서야 하나둘 서류전형에 합격하기 시작했다. 허씨는 “경력을 쌓기 위해 급여나 직종에 상관없이 인턴을 하려는 대학생이 많다. 그런 자리도 없어서 못할 지경”이라고 했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기업 입장에선 경력을 채용하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겠지만, 이런 추세가 굳어지면 취업시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팍팍해질 것”이라며 “청년실업 문제와 고용창출 효과 등 사회적 요구도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