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명숙 <11> 6평 지하방에 ‘자유터’ 열자 탈북 청소년 몰려들어

입력 2015-11-08 17:57 수정 2015-11-08 20:02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왼쪽)이 아들 이시헌군(오른쪽)과 함께 외국인 난민 지원활동을 펼치는 모습.

핑퐁난민사건이 알려지면서 신원이 노출된 남편과 나는 중국을 떠나 한국에서 사역을 이어가야 했다. 당시 중국 공안들에게 탈북자를 난민으로 대우해 달라고 하면 그들은 “중국은 동남아시아 출신 난민들을 잘 받아주고 있다. 한국전쟁 때 전 국민이 난민이었던 한국이 지금은 난민을 한 명도 받아주지 않으면서 탈북 난민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느냐”고 냉담하게 이야기했다.

남편은 “탈북자 문제를 난민 지원 방식으로 접근하려면 한국 땅에서 난민들을 잘 섬기는 것이 우선”이라며 난민지원 단체인 ‘피난처’를 설립했다. 외국인 노동자들 틈에서 숨죽이며 살았던 난민들은 난민사역 전문 단체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행복해 했다. 우리 부부는 어린 아들, 딸과도 사역 현장에 동행하며 열심을 다했다. 가끔 내가 힘들어하면 남편은 “태어날 때부터 박해를 받으며 사랑을 전한 예수님이 난민의 전형”이라며 나를 독려했다.

남편이 ‘피난처’를 통해 간접적으로 북한 형제들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다면 나는 그들을 더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해 탈북가정의 남한 정착을 도우면서 통일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진홍 목사님께서 설립한 대안학교에서 2년 동안 한문과 사회를 가르치면서 말썽꾸러기 학생들이 사랑으로 변화되는 경험을 한 것은 학교 설립의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2003년 1월 나는 서울 대림역 근처에 18㎡ 남짓한 반지하방을 빌려 야학인 ‘자유터 학교’를 개교했다. 이곳에 탈북청소년과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문제를 풀라고 시킬까봐 숨죽이고 있던 탈북청소년들은 자유터에 들어오면서 “이제야 살 것 같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들은 “북한에서는 배고파 못 살겠고 중국에서는 잡혀갈까봐 무서워 못 살겠고 남한에서는 몰라서 못 살겠다”고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중국에서도 아이들에게 ‘이자’의 개념을 가르칠 때 “선생님 우리 돈을 도둑놈들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은행이 우리 돈을 밤낮없이 지켜주는데 왜 우리한테 웃돈을 줍니까? 오히려 우리가 보관료를 내야죠”라는 말을 듣곤 했었다. 외국인 노동자나 아프리카 난민들은 ‘이자’라는 한국말은 몰라도 영어로 설명해 주거나 그들의 모국어로 설명하면 금방 이해했는데 탈북형제들은 사회 체제가 달라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해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외워. 은행, 이자, 통장”이라며 몰아붙이기도 했다.

이렇게 배운 탈북형제가 한국에 입국한 뒤 하나원을 거쳐 임대아파트에 거주했는데 이사 온 첫날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분명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굴까’라며 떨리고 무서운 마음으로 “누구십네까”라고 물으니 문밖에선 웬 50대 아주머니가 “네. 통장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놀란 탈북자는 “제 통장은 서랍에 있슴다”라고 대답하며 문을 안 열어 주고는 승강이를 벌였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자유터에서 공부하던 탈북청소년들은 친구들을 데려오면서 “선생님, 제 친구인데요. 얘도 저처럼 사랑해 주세요”라며 소개하곤 했다. 나는 몰라서 못 살겠다는 아이들을 남한 땅에 제대로 정착시키는 방법은 세상의 지식과 더불어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들을 근본적으로 살리는 길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교육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