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개신교 선교는 의료사업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알렌이 서울에 들어오고 나서 겨우 반년 만에 벌어진 급작스러운 일의 결과였다. ‘제중원’은 왕실의 든든한 후원과 미국 선교본부의 지원을 약속 받고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사업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부족한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여의사였다. 당시 의사는 장로회의 알렌과 헤론, 감리회의 스크랜턴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남자였다.
남자 의사들이 여자 환자들을 진료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한국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여자 환자들에게는 반드시 여의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여의사를 서울로 오게 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일본 한국 중국을 거쳐 형성되어 있는 선교부들(Missions) 사이의 네트워크를 최대한 동원해 직접 여의사를 찾아보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 당시 한국의 의사 선교사들은 너무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다. 다른 방법은 여의사가 필요하다고 열심히 본부(Board)에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여기에 절실히 필요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저의 길을 명확히 알았더라면 오래전에 그 사람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여의사입니다.”(알렌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1885년 10월 7일자 편지)
그리고 여의사 한 명이 서울에 왔을 때 머물 수 있는 주택과 일을 할 수 있는 별도의 여성전용병원 등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이 특별하게 애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아울러 장차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여의사의 역할을 설득력 있게 강조하기 위한 논리를 펴고자 앞세운 유력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왕비였다. 왕비의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세운 것이다.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 아시아 담당 총무 엘린우드는 알렌과 헤론의 말에 설득되었다.
테헤란에서 서울로 바뀐 선교지
엘린우드는 힘겹게 겨우 한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애니 엘러스(Annie J Ellers)라는 이름의 선교사 지망생이었다. 1860년생인 그녀는 미시건 주 버오크(Burr Oak) 출신으로 8남매의 다복한 장로회 목회자 가정에서 자랐다. 엘러스는 보스턴에 있는 한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여 졸업까지는 한 학기를 남겨두고 있었다.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서울에 여의사 한 명이 꼭 필요하다고 간청한 즈음인 1885년 가을, 그녀는 고향에서 휴가차 돌아온 이란 선교사를 만나게 된다.
이란에서 온 그녀는 엘러스에게 함께 이란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 결과 엘러스는 이란 선교사로 지원을 하였다. 그녀의 지원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테헤란 여성병원이 부임지로 결정됐다. 그녀는 페르시아어를 공부하면서 이란과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으며 앞으로 이란 여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녀는 대학에 다닐 때 교훈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마침 그때였다. 그녀는 선교사로 와 달라는 전보를 받았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곳이었다. 이름도 낯선 한국이었다. 엘러스의 거절은 당연했다. 뜻밖의 한국, 이란에 대한 약속, 부족한 준비 등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다시 전보가 왔다. “여의사를 구할 수 없어요. 당신이 와 주실 수 없겠습니까?” 엘러스는 그녀의 모든 계획이 전면적으로 수정되어야 하는 이 요청을 또 다시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 없이 한국으로 출발했다. 엘러스는 26세 되던 1886년 5월 22일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탔다.
불쌍한 조선의 여인들을 위하여
당시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길은 험난한 여정이었다. 엘러스는 보스턴에서 미시건으로, 또 미시건에서 시카고로, 그리고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최소 일주일 이상을 이동했다. 이어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으로 가는 태평양 횡단 증기선을 타고 20여일을 배를 타야 한국으로 오게 됐는데, 이 한 달 가까운 여정에는 일본 한국 중국 등지로 가는 선교사들과 합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1886년 5월 22일 그녀가 탄 배는 ‘City of Pekin’이라는 이름의 증기선이었다. 한국으로 가는 팀은 요코하마에서 배를 갈아타고 고베 나가사키 등을 거쳐 부산으로, 부산에서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오게 된다.
요코하마는 일본의 중심적인 선교지부가 있는 곳으로 초기 한국으로 가는 선교사들은 모두 이곳에서 한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엘러스도 요코하마에서 일본의 의사 선교사인 햅번을 만나 그의 집에 머물며 2주 동안 한국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그녀가 한국에서 할 일은 구체적으로는 서울의 제중원 안에 신설될 여성전용병원을 담당하는 것과 명성황후의 주치의가 되는 것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불쌍한 여성들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주는 것이었다.
엘러스는 서울에 도착해 알렌의 집에 머물며 한국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준비했다. 그녀에게는 한국의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기만 했다. 여성병원은 건물을 리모델링 해야 하는 상황이라 곧바로 시작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엘러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왕비였다. 명성황후는 엘러스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어떻게 조선을 좋아하게 되었느냐”고 물으며 “앞으로 조선을 좋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고, “고향의 날씨와 이곳의 날씨가 다를 텐데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엘러스에 대한 왕비의 따뜻한 격려의 말은 그녀로 하여금 낯선 곳에서의 불안과 걱정을 씻어내게 하였다. 엘러스는 한국으로 오면서 다른 여의사가 올 때까지 임시로 일하되 2년 동안만 머물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는 50년으로 연장되었고, 그녀를 통해 남겨진 유산은 지금도 이 땅에 이어지고 있다.
이용민 박사
◇약력=연세대 신학대학원(교회사·신학박사)을 졸업하고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연구이사, 아시아기독교사학회 총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만남성결교회 담임목사.
[첫 여성 의료 선교사, 애니 엘러스] “女의사 절실” 요청에 2년 기약 왔다가 50년 사역
입력 2015-11-09 18:10 수정 2015-11-09 2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