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어른들은 아이가 말을 안 들으면 “호랑이가 물어간다”고 겁을 줬다. 호랑이가 사라진 수십년 전부터는 “공부 안 하면 똥통 진다”고 겁박했다. 10여년 전부터는 “공부 안 하면 비정규직 된다”는 위협이 위력을 떨친다. 젊은이들 사이에선 “비정규직이나 되라”는 게 가장 심한 욕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은 계층, 신분, 패자, 빽(백그라운드) 없음, 무기력, 질곡 등 너무 많고도 무거운 함의를 지닌 단어가 됐다.
비정규직 문제가 특히 우리나라에서 더 심각한 것은 너무 많고(남용), 정규직과의 임금 및 근로조건 격차가 너무 큰 데다(차별), 너무 쉽게 해고되기(고용불안)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처럼 비정규직 임금이정규직의 70∼80% 수준이라면 그다지 큰 걱정을 하지 않을 텐데, 우리는 50∼60% 수준이니 여기에 차별적 요인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정부 통계에서도 비정규직이 다시 늘어났고,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는 물론 사회보험 가입률, 일자리 안정성까지 모두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이 4일 발표한 지난 8월 경제활동인구 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627만1000명으로 2003년 통계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올 6∼8월 비정규직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146만7000원으로 정규직의 269만6000원보다 122만9000원 더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의 54.4%로 지난해의 55.8%에서 격차가 더 벌어졌다. 비정규직의 평균 근속기간도 2년6개월에서 2년4개월로 줄었다.
비정규직 남용과 임금격차의 확대는 개별 기업의 인건비는 줄일지 몰라도 경제성장률 등 국가경제에는 해를 끼친다. 한국은행 조사국은 5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고용의 양적 확대가 저임금, 미숙련 근로자를 중심으로 이뤄질 경우 성장잠재력 둔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우리 일가족 혹은 적어도 사촌 이내 친인척 가운데 비정규직이 한 명 이상 있을 것이다. 사업주는 그런 심정으로 비정규직 남용과 차별을 삼가야 한다. 노사정위원회는 약속한, 그러나 시간이 많이 걸리고 실익은 없는 실태조사에 연연하지 말고, 차별시정절차의 효율화 등 할 수 있는 것부터 속히 합의해야 한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한마당-임항] 비정규 질곡
입력 2015-11-06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