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부총리가 국민 앞에서 약속한 내용을 다음 날 실무자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장면은 웬만해선 보기 힘들다. 지난 5일 국사편찬위원회가 국정 역사 교과서를 어떻게 만들지 설명하는 브리핑에서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집필 실무를 맡은 진재관 국편 편사부장은 집필이 완료된 단원을 공개할지를 묻자 “집필진과 상황에 따라 검토한다”고 답변했다.
이는 전날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확정고시 기자회견에서 한 말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황 부총리는 당시 “하나하나 단원이 나갈 때마다 국민과 함께 검증한다. 국민이 만든 교과서란 이름이 붙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황 부총리 바로 옆에는 황교안 국무총리도 있었다.
국민에게 다짐한 약속이 깨졌지만 정부는 무덤덤하다.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분위기까지 감지된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말 뒤집기’가 비일비재했던 탓에 어느 누구도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첫 약속부터 그랬다. 황 부총리 이하 교육부 직원들은 집필에 착수하면 필진을 투명하게 공개한다고 했다. 투명성이 국정화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이고, 훌륭한 필진으로 ‘1차 검증’을 받아 반대여론을 잠재우겠다고 자신했다. 이 약속은 “대표집필진만 공개하겠다”에서 한번, “대표집필진이 원하면 공개하겠다”로 두 번 뒤집혔다. 36명 안팎인 집필진 가운데 현재 공개된 사람은 2명뿐이다. 그나마 논란이 적은 상고사·고대사 책임자다. 이목이 쏠린 근현대사 부분을 맡은 필진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필진의 다양성을 꾀하겠다는 약속도 온데간데없다. 당초 교육부는 보수·진보·중도를 망라해 데려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릴레이 불참선언이 이어지자 집필의 효율성을 이유로 들며 “중도적인 학자로만 구성한다”고 번복했다. 이어 국편의 5일 브리핑에서 다시 말을 돌렸다. ‘중도’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게 핑계다. 진 편사부장은 “필진이 확정되면 그런 부분(중도의 기준)을 별도로 고민할 것”이라고 했다. 일단 집필진을 꾸리고 난 뒤 이들이 중도가 맞는지 판단하겠다는 소리다.
아직 어기지 않은 약속이 하나 남았다면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지 않겠다” 정도다. 이 약속은 교과서 내용이 일반에 공개되는 내년 말에나 지켜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교과서 내용이 나오고 몇 개월 뒤엔 학생들이 그 책으로 역사를 배운다. 엉터리 교과서라도 돌이키기 어렵다. 정부는 “아직 나오지 않은 교과서” “정부를 믿어 달라”고만 하고 있다. 국민에게 한 약속을 이튿날 뒤집고서도 사과나 해명 한마디 없는 정부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이도경 사회부 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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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1-05 2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