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최모(26·여)씨는 지난 9월 말 떠나는 4박6일 태국 방콕 여행상품을 7월 중순에 예약했다. 일찌감치 예약한 덕에 32만원으로 항공권과 호텔을 잡을 수 있었다. 성수기에 비싸게 다녀온 동료들을 보며 시간을 두고 미리 예약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8월 17일 방콕 도심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만족은 불안으로 돌변했다. 한국관광공사 트위터에 방콕 방문자는 안전에 유의하라는 권고도 올라왔다. 결국 출국을 한 달여 앞두고 여행사에 환불을 요청했다.
여행사 측은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여행사 사정이 아닌 고객이 원한 취소여서 13만원을 부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체 경비의 40%나 된다. 가지도 않은 여행, 그것도 출국까지 한 달 넘게 남았는데 절반에 가까운 돈을 날려야 한다니 화가 치밀었다.
규정이 그렇다는 말에 별 방법이 없어 환불을 미루고 마음만 졸였다. 며칠 뒤 테러범이 잡혔지만 최씨는 불안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여행을 다녀왔다.
‘위약금의 굴레’가 소비자를 옥죄고 있다. 계약서를 작성하는 모든 거래에는 위약금이 뒤따르고, 공정거래위원회는 분야별로 ‘적정 위약금’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적정선을 터무니없이 벗어나는 과도한 위약금이 한국인의 소비생활 곳곳에 일상화돼 있다.
최씨는 위약금을 한 푼도 낼 필요가 없는 경우였다. 공정위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은 여행상품 해약 때 출국일이 한 달 이상 남았다면 위약금을 물리지 않는 게 ‘적정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 달 미만일 경우 남은 일수에 따라 산정한다. 적정 위약금은 0%지만 현실은 최씨에게 40%를 요구했다.
김모(53)씨는 2009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경기도의 한 추모공원과 250만원에 봉안당 이용 계약을 맺었다. 연간 10만원 관리비도 5년치를 미리 냈다. 나중에 아버지도 함께 모시려고 ‘부부단’을 추가로 420만원에 계약했다.
지난해 어머니 유골을 이장할 사정이 생기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김씨는 부부단 계약 금액 환불을 요청했다. 추모공원 측은 420만원 중 위약금 294만원(70%)을 떼고 126만원만 돌려줬다. ‘봉안일부터 5년 이내 해지 시 30%만 환급한다’는 약관을 들이미는 통에 항의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비자 분쟁해결 기준’에는 납골당의 경우 계약 후 4∼5년이 지나 해지할 때 50%(210만원)를 돌려받을 수 있다고 돼 있다.
할인 혜택 등에 혹해 장기 계약을 맺었다가 거액의 위약금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위약금을 둘러싼 분쟁도 끊이지 않는다. 위약금은 계약의 안정성을 위해 필요하지만, 이렇게 과도한 현실은 소비자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해 선택권을 침해한다. 분쟁·소송 등 불필요한 갈등과 행정적 낭비를 초래한다.
한국소비자원 박미희 박사는 5일 “여러 분야에 소비자에게 지나치게 불리한 약관이 있다. 소비자는 계약서 작성 때 해지를 예상하기가 쉽지 않아 불리한 위약금 조건도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며 “적정 위약금이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선 소비자가 약관을 미리 살피고 분쟁해결 기준을 사전에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홍석호 기자 will@kmib.co.kr
‘위약금 공화국’… 소비자 분통, 업자는 불통
입력 2015-11-05 2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