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이 아름다운 만큼 새것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과거나 미래는 우리와 간접적인 관계밖에 맺지 않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는 직접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늘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현재의 가치에 대한 전혀 다른 설명이다. 두 개의 시선을 만난 건 최근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 안이었다. 뒤늦은 여름휴가를 위해 13시간 비행기 안에 갇히게 되면서, 시베리아 상공을 날아갈 때 미리 챙겨 놓은 책을 펴고 영화를 틀었다. 시간대를 거슬러 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간을 대하는 엇갈린 태도를 만났다.
개인적으로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한다. 그의 여정을 따라가는 지극히 사적인 숙제를 해오고 있었다. 이번 휴가는 그 숙제의 마무리였다. 여행길에 굳이 10년 전 읽은 책과 3년 전 본 영화를 챙긴 건 여행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고흐의 세계에 푹 잠기기에는 혹여나 내 마음의 준비가 부족할까, 숙제의 마무리가 만족스럽지 못하게 될까 봐 보충교재 삼아 집어넣었다.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고흐가 자신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를 엮었다. 고흐는 네덜란드와 유럽의 화풍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독한 싸움을 하면서 동생 테오에게 예술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썼다.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는 잘나가는 할리우드 영화작가에서 소설가로 전향하려는 남자주인공 길이 ‘문화의 황금기’라 부르며 동경해 온 192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눈치 챘겠지만 과거를 더 높게 평가한 건 영화 주인공 길이고 행동할 수 있는 현재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 이는 고흐다.
여기에서 생각이 복잡해졌다. 묘하게 대한민국과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현재와 과거의 가치 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두고 편을 갈라 싸우고 있다. 여지없이 진보와 보수로 색깔이 나뉜 채로. 그런데 이 싸움이 재미있다. 초반, 정부와 여당의 무게중심은 과거에 쏠렸고 야당은 현재에 집중했다. 정부는 검정체제의 국사 교과서는 역사적 편향성이 심하다며 국정 교과서의 당위성을 강조한 반면 야당은 경제 살리기 등 현안이 산적해 있다며 여당에 맞서왔다.
그런데 3일 정부가 확정고시를 강행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됐다. 여당은 “민생과 경제를 살려야 할 때”라며 철야농성에 들어간 야당을 압박하고 있다. 이에 야당은 ‘유신독재정권 시절 긴급조치 같다’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퇴보를 우려했다.
어찌됐든 과거를 둘러싼 갈등은 현재에 타격을 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지쳐가는 이들은 국민이다. 국회 본회의 등은 줄줄이 취소되거나 연기됐고 36개 민생관련 법안 처리와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도 뒤로 밀렸다. 그렇다면 고흐와 영화 속 길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전혀 다른 시선임에도 결론은 같았다. 힘들고 고단한 현재도 언젠가는 찬란한 과거로 기억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찬란한 과거로 기억될 수 있도록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무언가를 직접 할 수도 있다는 희망도 있다. ‘현재(present)가 선물(present)’이라는 구태의연한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걸 대한민국 정부와 정치권도 알아야 할 텐데.
서윤경 경제부 차장 y27k@kmib.co.kr
[세상만사-서윤경] 과거와 현재의 가치 충돌
입력 2015-11-05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