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부희령] 장소의 기억

입력 2015-11-05 18:03

뜨거운 물을 붓고 거름종이 속에서 커피가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지켜본다. 포장지에 적혀 있던 콜롬비아 수프리모 혹은 케냐AA라는 이름을 떠올려 보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콜롬비아에서 왔든 케냐에서 왔든, 그 맛과 향의 미세한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

커피를 드립하듯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추출해낼 수 있다면, 흘러나오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일까, 감정일까, 욕망일까. 그 모든 것을 합쳐도 설명이 안 되는 무엇일까. ‘세검정 수프리모’나 ‘대전역 AA’, ‘설악면의 어느 날 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모닥불’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걸까.

얼마 전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가 있는 동네에 갈 일이 있었다. 이제는 낯설어진 곳. 아침저녁으로 들락거리던 문구점이 있던 거리. 직장에 다니는 어머니가 퇴근하기 전까지 혼자 있기 싫다며 날마다 내 손을 잡아끌던 친구의 집이 있는 동네. 우리 집은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열 정거장쯤 가야 했다. 거리를 이리저리 걷다가, 버스 정류장에서 잘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선 여자애를 언뜻 본 것 같기도 했다.

한때 몸을 의탁했던 장소는 그 모습이 변했든 변하지 않았든 여전히 그 시간을 품고 있다. 기억은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바람이 지나가는 길, 햇살이 꺾어지는 골목 어귀에서 문득 돌아보는 시선을 기다리며 남아 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나 예전에 살던 동네에 가 볼 일이다. 겁에 질려 달려갔을 어두운 골목길을 걷다가,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며 서 있었을 역전을 지나치다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다가, 그 사람조차 알 수 없던 두려움이나 망설임, 즐거움과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침내 ‘세검정 수프리모’나 ‘대전역 AA’, ‘설악면의 어느 날 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모닥불’의, 그 미세한 맛과 향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게 될지도.

부희령(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