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만에 법정에서 다시 만난 두 친구의 운명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4일 오후 서울법원종합청사 417호 대법정. 1997년 ‘이태원 살인사건’ 현장에 있었던 에드워드 리(36)가 모습을 드러냈다. 건장한 체격은 18년 전(180㎝, 105㎏) 그대로였다. 리의 시선은 하늘색 수의 차림으로 피고인석에 앉은 옛 친구 아서 존 패터슨(36)을 외면했다. 굳은 표정으로 증인석에 앉은 뒤 입을 뗐다. “저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찌르는 것을 봤습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심규홍) 심리로 열린 패터슨의 첫 정식재판에 리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리의 아버지와 피해자 조중필(사망 당시 22세)씨의 어머니도 방청석에서 이를 지켜봤다. 재판부는 리에게 “이미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위증만 아니면 이 사건으로 형사처벌 받을 위험은 없다”고 설명했다. 18년 전 ‘진범’으로 기소됐다가 대법원 무죄 판결로 회생(回生)했던 그는 한결 밝은 표정으로 증언을 시작했다.
◇18년 전 그곳, 그때 그 사람들=법정은 18년 전 ‘이태원 살인사건’이 일어난 패스트푸드 가게로 돌아갔다. 검찰은 경찰 초동수사 당시 촬영된 현장 사진을 스크린에 띄우며 리의 위치와 동선, 피해자 조씨가 배낭을 메고 있었는지 등을 꼼꼼히 따졌다. 리는 대부분 질문에 “시간이 많이 지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배낭 색깔은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배낭을) 메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검사가 “패터슨에게 ‘멋진 걸 보여주겠다(I’m going to show you something cool)’며 같이 화장실로 가자고 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대마 등 마약을 한 적이 없느냐”는 질문에는 “아니다(No, I’m not)”라고 했다.
이어 패터슨 측의 반대신문이 시작되자 법정 공기는 달라졌다. 변호인이 같은 상황에 대한 질문을 반복하자 리는 “제 어린 아들이 똑같은 질문을 계속하는 것 같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변호인이 “왜 자꾸 질문에 모른다고만 답변하느냐”고 추궁하자 “나는 조씨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숨길 이유가 없다”며 항변하기도 했다.
패터슨은 증언하는 리의 얼굴을 줄곧 응시했다. 리는 변호인과 눈을 마주쳤을 뿐 패터슨의 눈길은 피했다. 이전 재판에서 줄곧 영어를 사용했던 패터슨은 “판사님, 잠시만요. 지금 물어보신 것 통역이…”라며 한국어로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리는 과거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거짓반응(살인)이 나온 것에 대해 “‘사람을 죽였느냐’는 내용뿐 아니라 다른 질문도 포함돼 있었다”며 “당시 나는 묶여 있었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고 했다.
◇“서로 안 죽였다고…옛날과 똑같아”=재판부는 법정에 나온 조씨의 어머니 이복수(73)씨에게 발언 기회를 줬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이씨는 “18년 전 재판하고 똑같다. 범인 둘이 서로 안 죽였다고 미루는데, 정말 인간의 탈만 썼지 사람 같지 않다”고 울먹였다. 이어 “아들과 같이 밥도 먹고, 안아주고도 싶다. 죽은 아들 한이라도 풀게 범인을 밝혀 달라”고 했다. 이후 숨진 아들의 핏자국이 가득한 현장 사진이 법정 스크린에 나타났다. 이씨는 차마 보지 못하고 재판부의 권유에 따라 자리를 떴다. 다음 재판은 11일 오후 2시에 열린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패터슨 살인혐의 첫 공판] “그가 찌르는 것을 봤다”… ‘이태원의 그들’ 뒤바뀐 운명으로 조우
입력 2015-11-04 21:54 수정 2015-11-04 2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