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는 운동가를 /술보다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
1994년 문단은 최영미(54) 시인의 해였다. 30대 풋내기 시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가 공전의 히트를 친 건, 이념을 벗어던지고 개인의 가치를 산뜻한 봄옷 마냥 꺼내들던 시대적 성감대를 건드린 덕분일 것이다. 더욱이 ‘아아-컴-퓨-터와 씹할 수 있다면!’(‘Personal Computer)’ 중) 같은 당돌한 시어를 구사해, 섹스를 화두로 삼아 “청춘과 운동, 사랑과 혁명 같은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질퍽하게 하나로 동화시켰다(최승자 시인)”는 호평을 들었다.
이후 51쇄(50만부)를 낼 정도로 인기를 끌며 서른 살의 필독서가 된 이 시집의 개정판이 21년 만에 나왔다. 어느덧 50대 중반이 된 시인은 4일 국민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인문학 특강 등을 다니며 내가 쓴 시를 20년 만에 새로 읽게 됐다. 쓸 데 없는 부사 등이 눈에 띄었고 선생이 학생 시를 고치듯 손 보고 싶었다”며 개정판 출간 배경을 설명했다. ‘마포 뒷골목에서’ 등 3편은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생각에 삭제했다. 하지만 “표현이 거칠다는 얘기를 들은 부사나 과도한 수식어 등을 가지치기 하듯 정리했을 뿐 가필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어를 덧붙이고 싶은 욕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시절의 시대성이 있으므로 서툰 대로 온전히 두고 싶었다”는 것이다.
시는 1985년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이후 반실업자로 6∼7년을 보내던 때에 썼다. 그는 “신림동 고시원을 전전하며 외롭고 힘들게 살던 시절, 매일의 생활을 기록하듯 시를 썼다”고 말했다. 당시는 시인이라고 의식하지도 않고, 등단할 생각도 갖지 않았던 만큼 시어가 거칠다는 평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애썼다고 회고했다. 그는 1992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대가 바뀌니 요즘 대학생에게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묘사도 적지 않다. ‘가능한 모든 대립항들, /시력을 해치던 최초의 이편과 저편에 대해’(‘나의 대학’ 중 ) 같은 시구가 그런 예다. 운동권 내에서 사회구성체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며 등사기로 인쇄한 흐릿한 유인물로 배포되던 당시 대학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럼에도 세대를 뛰어넘어 지금의 청춘에게도 먹힐까.
“실업자 때 쓴 시들이잖아요. 사회에 안착하지 못한 개인의 기억인 만큼 (삼포세대로 불리는 )요즘 세대들도 공감할 거라고 생각해요.”
개정판에서는 표지 그림도 바꿨다.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에서 제임스 휘슬러의 ‘성난 바다’ 그림으로 갈았다. 당시 내면을 채웠던 분노, 쓸쓸함의 정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이유로 시인이 직접 골랐다. 그는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석사 학위를 받았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책과 길-서른, 잔치는 끝났다] 청춘과 운동 그리고 사랑과 혁명… 21년 만에 개정판 나와
입력 2015-11-05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