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취업과 입시 현장에서 나타나는 대세는 ‘스펙’ 지우기다. 바늘구멍만큼 좁은 대기업이나 공기업 취업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해외 어학연수, 봉사활동 등 스펙 관리에 들어가는 막대한 시간과 돈을 줄여주기 위한 차원이다. 대신 인성과 적성을 중시하고, 나아가 면접에서 아예 지원서상의 출신학교까지 가리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보는 곳도 느는 추세다. 대학 입시에서도 자기소개서에 토플 텝스 등 어학 성적이나 경시대회 입상 경력 기재 시 감점 요인이 될 정도로 이제 스펙은 퇴출돼야 할 애물로 전락했다.
기자 4∼5년차 시절 경제부처에 출입하면서 의아스러웠던 점이 하나 있었다. 의원들이 국회에 장관들을 불러놓고 큰소리치면서도 정작 개각철만 되면 장관 하마평이 나도는 이유가 궁금했다. 자신들에게 굽신대는 장관을 왜 나서서 하고 싶어 할까 하는 이 의문은 곧 풀렸다. 장관 경력을 달고 총선에 나가면 먹힌다는 것이었다.
강봉균 당시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취임 6개월여 만에 총선에 차출된 것도 경제 수장이란 타이틀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타향인 경기도 성남에 출마한 그는 고전 끝에 떨어지고 일찌감치 산업경제과 과장직을 그만두고 성남의 다른 지역구에서 텃밭을 갈다 나간 임태희씨는 여유 있게 당선됐다. 장관은 떨어지고 과장이 당선되니 장관 타이틀도 별것 아니라는 비아냥이 나왔다.
우리 사회 분위기는 환골탈태를 거듭하는데 정치인들은 이처럼 장관직을 스펙관리용 쯤으로 치부하는 버릇은 여전한 듯하다. 지난 3월 취임한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과 유일호 국토교통부 장관은 8개월여 만에 경질 통보를 받고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이다. 유기준 장관이 남긴 업적을 따져봤지만 세월호 인양작업을 시작한 것 말고는 다섯 손가락 꼽기도 벅차다. 인양할 선체를 어떻게 활용할지, 어민들 사이에 최대 이슈로 떠오른 한·중 자유무역협정 비준 이후의 대책은 어떻게 풀어갈지 등 과제가 산적한데 그는 8개월 장관 스펙을 달고 그만의 지역구민에게로 달려갈 것이다. 그의 이런 행보에 해수부 출입기자들이 최근 송별 만찬 제의를 거부했다. 후임으로 오는 김영석 장관 내정자 인사청문회를 고려했다는 게 해수부 측 설명이라지만 사실은 기자 간사단이 보이콧했다고 한다.
기자들은 취임 때부터 총선 출마를 위해 곧 떠날 것이 뻔했고 실제로 이를 실행한 단명 장관을 송별회까지 해줄 이유가 있느냐는 얘기가 나왔다. 기자단은 장관이 떠날 때마다 기념패를 수여했지만 여수 기름유출 사고로 퇴진한 윤진숙 전 장관에 이어 유기준 장관은 기념패를 받지 못하는 두 번째 장관이 됐다. 유일호 장관 역시 DTI·LTV 규제 완화로 부동산 시장을 달궈 가계부채를 늘려놓은 것 말고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역시 연말이 되면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경제가 힘을 잃어가는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표밭으로 달려갈 것이라는 점은 기정사실처럼 돼 있다.
공교롭게도 표밭을 향해 떠날 예정인 이들이 전부 경제부처 장관들이다. 인사 공백으로 경제 정책의 맥이 끊김은 불문가지다. 당초 이들의 장관 기용 목적은 힘 있는 친박계 정치인 장관이 대통령의 뜻을 잘 헤아려 경제 정책을 강력히 밀어붙이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선거 홍보물 경력란에 기재할 ‘장관 스펙’ 말고는 당초 목적을 기억할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장관 퇴임 후 연금을 주는 것은 스펙용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한 대가다. 연금 지급 자격에서 단명 장관을 제한하도록 범국민운동이라도 펼쳐야 할 판이다.
이동훈 경제부장 dhlee@kmib.co.kr
[데스크시각-이동훈] 장관이 스펙 관리용인가
입력 2015-11-04 18:23 수정 2015-11-05 1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