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라고 하면 흔히 사고, 재난, 학살, 강간 같은 끔찍한 사건을 연상하게 된다. ‘충격적인 사건이 만들어낸 심리적 상처’ 정도의 의미로 통하는 정신의학적 용어인 트라우마는 근래 들어 사용 빈도나 범위가 확장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여전히 ‘충격적이고’ ‘예외적인’이라는 한정이 그 용어에 붙어 다니는 게 사실이다.
‘나는 더 이상 너의 배신에 눈감지 않기로 했다’는 배신에 트라우마를 끌어들여 ‘배신 트라우마’를 현대인의 정신적 문제 중 하나로 제기한다. 책은 “우리 삶 한가운데 배신이 있다”로 시작된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배신을 경험한다. 배신을 하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배신에 눈을 감기도 한다. 배신은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오기도 하고, 직장은 조직의 배신과 동료들의 눈감기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공정할 것이라고 믿었던 정부나 국가기관으로부터의 배신도 목격하게 된다.
배우자의 외도나 동료의 위증 같은 심각한 배신은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런 점에서 배신을 트라우마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은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배신을 당한 경험에서 오는 트라우마가 아니다. ‘배신에 눈감기’라고 이름 붙인, 배신을 당하고도 배신을 부인하거나 미화하는 행위, 주위에서 벌어지는 배신을 외면하거나 모른 척하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트라우마에 주목한다. 그것은 배신이 준 상처가 아니다. 배신에 눈감기를 통해 자신이 자신에게 준 상처다.
배신 트라우마라는 독창적인 연구 분야를 개척한 미국의 여성 심리학자 제니퍼 프리드(오리건대 심리학과 교수)가 동료인 파멜라 비렐(오리건대 심리학과 전임강사)과 함께 쓴 이 책은 배신에 눈감기라는 심리 현상을 다섯 가지 측면에서 탐구한다. 배신에 눈감기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배신에 눈감기를 하는가, 배신에 눈감기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배신에 눈감기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어떻게 배신에 눈감기에서 벗어날 것인가 등이다.
저자들은 외도, 폭행, 유괴, 성추행 등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배신에 눈감기가 현실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여성은 남편이 딴 여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도 불륜을 의심하지 못하다가 섹스를 목격하게 되고,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한 딸은 그 사실 자체를 자기 기억에서 말소하려 애쓴다. 유괴당한 소녀는 유괴범과의 관계가 사랑이었다고 경찰에게 진술하기도 한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얘기도 나온다. 힐러리는 정말로 빌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을 몰랐을까? 저자들은 힐러리는 그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분석한다. “주변에 온통 증거가 널려 있는데도 힐러리는 보지 못했다. 현명하고 강하고 누구나 뛰어난 여성인 힐러리는 자신이 당하는 배신에 눈을 감는 능력이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들의 선택은 ‘눈감기’였다. 배신을 당할 때 눈감기는 흔히 발견된다. 그 동기는 보호본능, 생존욕구, 이익 등 다양하다. 배신에 눈감기는 개인 사이의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눈감기는 조직이나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억압에 대한 기본 반응이기도 하다.
회사원들은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비리를 외면하고, 카톨릭 교회는 신부들의 성범죄를 은폐하며, 시민들은 정부의 부정과 억압에 침묵한다. 아일린 주브리겐(캘리포니아대 심리학 교수)은 정부의 거짓말을 진실로 믿는 현상에 대해 연구한 뒤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정서적 혹은 재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속임수에 가장 먼저 눈을 감는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우리는 배신을 경험하면서 배신과 맞서 싸우는 경우도 있지만 배신을 인식하고 반응하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배신에 눈을 감은 상태로 살아가기도 한다. 어느덧 배신은 사회생활의 지혜로 인정되고, 배신에 눈감기에 길들여진다. ‘배신에 눈을 감은 상태’ ‘배신에 눈감기’ ‘배신에 길들여진 삶’ 등 배신을 키워드로 현대적 삶을 규정할 수 있다.
저자들은 그러나 배신에 눈감기는 마음속에 상처를 남기며, 그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내면을 갉아먹어 결국 삶을 훼손하고 만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이나 대상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배신에 눈을 감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성장할수록, 그런 관계는 거짓이며 우리 자신을 얽맬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배신에 훼손당하는 삶을 회복하기 위한 첫 단계는 눈을 뜨고 배신을 직시하면서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배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배신을 폭로하지 않는다면 치유도 없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 그의 배신을 우리는 정말 몰랐을까
입력 2015-11-05 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