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억년 지하궁전 태고의 신비, 강원도 평창 백룡동굴

입력 2015-11-04 18:29
강원도 평창군 백운산 자락에 위치한 백룡동굴을 찾은 탐방객이 동굴 내 좁은 통로를 지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한 모습을 간직한 이 동굴에 들어서면 신비로운 지하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백운산 자락에 위치한 백룡동굴은 거대한 예술품이다.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한 모습을 간직한 ‘새것’ 그대로의 동굴이다. 이곳을 둘러보는 것은 ‘관람’이 아니라 ‘탐사’에 가깝다. 복장을 갖추고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드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때로는 바닥을 기어야하고, 낮은 포복으로 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미지의 지하세계를 탐험하는 듯한 기분이다.

동굴이 발견된 것은 1997년. 이후로도 거의 사람 손을 타지 않았다. 국내 최고의 동굴생성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인지 동굴은 아직도 천연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일반인에게 허락된 건 2010년. 5억년 전 지구 저편의 시간의 문이 드디어 열렸다. 다만 관광이 아닌 탐사여야 하고 하루 12차례 운영된다. 겨울에는 하루 5번, 1회에 20명으로 줄어든다. 사람의 숨으로 나오는 이산화탄소에 의해 동굴이 변형되기 때문이란 게 이유다. 사전예약은 필수다.

동굴은 ‘C자형’이다. 길이가 1875m. 지질학적 나이는 5억년 쯤 된다. 지하수가 석회암을 녹여 기이한 형상을 만들고 침식과 붕락작용(천장의 암석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거듭해 공간을 넓힌 전형적인 석회암동굴이다.

동굴은 3개 군에 걸쳐 있다. 초입은 평창, 중간은 영월, 끝 부분은 정선에 속한다. 또 동굴은 주굴(A지역)과 가지굴(B∼D지역)로 나뉜다. 이 중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굴은 주굴(785m). 전체적으로 높낮이가 심하지 않은 수평굴이지만 낮은 포복과 기어가는 몇몇 구간이 있어 흥미진진함을 더해준다.

백룡동굴은 국내 유일의 생태체험 동굴이다. 탐사를 위해서는 관리사무소에서 제공하는 ‘우주복’과 장화, 헬멧을 착용하고 인솔자를 동반해야 한다. “광원복장이라 생각하면 탄 캐는 사람으로 보이고, 소방복이라 생각하면 불 끄는 사람으로 보이겠죠. 저는 우주복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우주인이 되겠죠?” 동굴해설사의 말이 와 닿는다.

동굴입구까지는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간다. 입구는 비밀번호 잠금 장치가 부착된 철문으로 막혀있다. 들어가기 전 해설사의 당부사항이 이어진다. 동굴내부의 종유석이나 석순은 절대 만지지 말라는 게 우선이다. 손에 붙은 미생물이 동굴생태에 영향을 줘 색이 변하기 때문이란다. 동굴 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방울을 먹는 것도 금지다.

입구를 들어서면 초입에는 반석과 황토로 만든 구들장이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숯덩이를 탄소측정한 결과 1800년대 것으로 판명됐다. 이후로 약 200m 정도 더 들어가면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내부에는 기본적인 안전장치 외에는 조명이나 철제구조물이 거의 없다.

해설사가 “수그리세요. 미리 일어서면 다쳐요”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어른 몸통만 한 구멍을 힘겹게 빠져나오자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진짜 동굴이 펼쳐진다. 천장의 물에 의해 만들어진 종유관과 종유석, 땅에서 솟아오른 석순, 종유석과 석순이 만난 석주…. 억겁의 세월 동안 만들어진 온갖 모양새로 기교를 부려 보는 이를 현혹한다.

물과 시간이 빚은 자연예술품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지금껏 이름을 얻지 못한 ‘작품’이 더 많아 눈앞에 다가오는 기이한 형상마다 별칭을 붙여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돌만 있는 게 아니다. 동굴에는 몸통 전체가 하얀색을 띤 아시아동굴옆새우를 비롯해 반도굴아기거미 등 56종의 생명체가 살고 있다.

내부로 파고들수록 눈앞에 펼쳐지는 지하세계는 절정을 이룬다. 종유석과 석순, 석주들이 한자리에 모여 ‘삼라만상’을 연출한 작은 광장에 들어서면 세월의 조화가 빚어낸 기묘함에 입을 다물기가 쉽지 않다. 종유석과 석순이 무리를 이루고 고목을 베어놓은 듯한 방패형 석순은 어디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것. 보석처럼 빛나는 동굴산호, 꼬불꼬불한 베이컨시트, 유석(流石), 동굴진주, 동굴커튼, 석화, 부유방해석 등 눈길 주는 곳마다 황홀경이다. 어떤 것은 버섯을 닮았고, 어떤 것은 영락없는 사람 모양새다. 손 모양을 한 ‘신의 손’, 다랑논을 닮은 휴석(畦石)도 신비롭다.

동굴 끄트머리 막장에 이르자 드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다양한 동굴생성물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종합전시관이다. 동굴 내에서 유일하게 조명이 설치된 이곳에선 노란색의 ‘에그 프라이형’ 석순을 볼 수 있다. 국내 동굴에서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춘 ‘명물’이다.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광장 조명과 헤드랜턴을 모두 끄자 ‘절대 암흑’과 ‘절대 고요’의 세상이 펼쳐진다. 눈을 떴는데도 감았을 때와 차이가 없다. 시간조차 정지된 느낌이다. 한 줄기 빛에 대한 고마움이 저절로 우러나온다. 그 순간 광장 한 구석 흘러내리듯 만들어진 유석에 희미하게 빛이 들어왔다. 백룡동굴의 유일한 조명시설이다.

불편함이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이 백룡동굴 탐사의 진짜 매력이다. 수 억년 자연의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불편조차도 감사했다. 출발지로 돌아왔을 때는 2시간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평창=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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