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명숙 <8> 공안 단속에 불안감 높은 탈북자들 툭하면 화부터

입력 2015-11-03 17:59
중국의 은신처에서 보호하던 탈북 어린이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오른쪽). 이 사진은 KBS ‘일요스페셜 13인의 탈출’에 방송됐던 장면을 캡처한 것이다.

탈북자들과 함께하는 중국에서의 삶은 철저하게 제한됐다. 중국 공안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는 식료품을 배달시키는 것도, 함께 시장을 보러 가는 일상적인 일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집주인이 이해하기 힘든 광경을 보여줘야 했다.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한쪽 어깨에는 10㎏이 넘는 쌀가마니를 얹고 다른 손에는 채소를 한가득 사서 집으로 날랐다. 당시 체중이 40여㎏밖에 나가지 않던 나는 힘이 들어 눈물을 흘리면서도 식료품들을 날랐다. 이웃들이 ‘몸도 약하다는 새댁이 웬 먹성이 저리 좋아 쌀가마니를 저렇게 자주 나르나’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 같았다. 땀범벅이 되어 쌀을 집어던지듯 내려놓고 쓰러지면 탈북 형제들은 내 주변으로 몰려와 미안해했다. 아이들은 손부채질을 해주며 연신 볼에 입을 맞추고는 죽지 말라고 울었다. 어른들도 매일 힘들게 일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측은해했다. 그들은 그렇게 마음을 열어갔다.

내가 식료품을 구입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길어지는 날이면 어른들은 혹시나 단속에 적발된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해했다. 그 불안감이 커지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날엔 고성이 오가며 다툼이 생기기 일쑤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행여나 이웃들이 신고할까 걱정되어 남자들에게 “다 큰 어른들이 아이들 보는 데서 이러면 되겠느냐”며 훈계하면서 말렸다. 가부장적인 북한사회에서 살던 남자들은 여자인 데다 어리기까지 한 내가 훈계한다며 화부터 냈다. 그들에게 “쌍간나 개간나 종간나”라는 ‘3박자 간나’ 욕을 들어야 했다.

북한 체제에서 살아오면서 가부장적 문화가 몸에 배어 있던 어른들을 뒤로한 채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지식과 예절, 복음을 함께 받아들이며 날마다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예쁘고 기특해 열심히 가르치다 어느 날 저녁식사 시간을 넘겼다. 밥을 안 준다며 짜증낼 어른들이 두려워 허둥지둥 주방으로 발을 옮겼다. 깜빡하고 싱크대에 쌓아 둔 점심 설거지부터 하려고 가 보니 한 아이의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부엌 근처에는 가지 않는 것이 북한 남자들의 습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있잖습니까. 사발가시기(설거지)는 남성 동무들이 해야 벅벅 잘 까셔짐다(닦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다음 말이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짐을 덜어드릴 테니 우리 아이들을 좀 배와 주세요(가르쳐 주세요).”

늘 듣던 ‘3박자 간나’ 대신 ‘선생님’이라고 나를 부르는 그를 보며 깜짝 놀랐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3대를 “수령님 장군님 원수님”으로 부르며 나이 많은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만 ‘님’자를 붙인다. 회사 사장이라고 해도 ‘지도원 동지’라고 부르고 유일하게 직업에 ‘님’자를 붙여주며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직업 혁명가로 칭송받는 선생님들이다. 다음세대에게 북한의 사고방식을 세뇌시키기 위해 제일선에서 교육하는 교사에게 권위가 있어야 학생들이 잘 따르고 제대로 배우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아이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나를 선생님으로 인정해준 것이다. 자기 아내가 아파도 주방일만큼은 손 하나 까딱 하지 않는 것이 북한 남자들인데 40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은 설거지를 해가며 나를 돕겠다는 그 아버지 모습을 생각했다. ‘북한 사역은 아이들을 통해 부모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 사역으로 접근해야 효과적이겠구나’라고 말이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