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대통령 “성신지교 말한 선각자를 알고 있는데요…”

입력 2015-11-02 23:55
“일본에도 한·일 관계는 진실과 신뢰에 기초해야 한다는 성신지교(誠信之交)를 말씀하신 선각자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일 오전 청와대 집현실에서 열린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의 확대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이같이 말했다. 얼핏 양국 간 우호를 강조하는 발언으로 보이지만 속뜻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선각자’는 임진왜란을 ‘살상극’으로 규정하고 한·일 우호를 강조한 에도(江戶)시대의 일본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이기 때문이다.

3년 반 만에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단독·확대 회담으로 이어지며 예정보다 긴 1시간38분 동안 진행됐다. 두 정상은 위안부 문제 등 최대 현안에 대해 기탄없이 대화하며 반전(反轉) 모멘텀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박 대통령은 오전 10시5분부터 청와대 백악실에서 아베 총리와 위안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단독회담에 들어갔다. 예정된 30분을 넘겨 1시간 동안 이어진 단독회담에서 두 정상은 ‘위안부 문제 조기 타결을 위한 협상 가속화’ 합의를 이끌어냈다. 2011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 회담 등에서 발생했던 정상 간 논쟁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회담에는 우리 측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 김규현 외교안보수석이, 일본 측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과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관방부(副)장관,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일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장이 배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기우다 부장관은 지난해 10월 고노 담화에 대해 “역할이 끝났다”고 발언한 강경우익이다.

단독회담이 끝나자마자 두 정상은 옆 집현실로 이동해 38분 동안 확대 회담을 시작했다. 이때 박 대통령이 모두발언에서 ‘성신지교’를 언급한 것이다. 이는 아메노모리가 저술한 대조선 외교지침서 ‘교린제성(交隣提醒)’에 나오는 개념으로,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도 일본을 방문해 언급하면서 화제가 됐다. 박 대통령이 또다시 아메노모리의 말을 꺼낸 것은 아베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 진전을 위한 신의를 보여 달라’는 일종의 압박이었던 셈이다. 확대 회담에는 양측 각 9명씩 보좌진이 배석했다.

두 정상은 전날 한·중·일 정상회의나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과는 달리 공동기자회견은 갖지 않았다. 자국 언론을 상대로 개별적인 브리핑이나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앞서 정상회담을 가진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와 박 대통령은 만찬을 함께했지만 한·일 정상은 오찬도 갖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환대’와 대비되면서 다소 ‘썰렁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아베 총리는 정상회담 후 서울시내 호텔에서 일본 기자단과 기자회견을 연 뒤 서울 인사동 식당에서 별도 오찬을 가졌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방문을 요청했지만 이 역시 거절했다. 9년 만에 방한한 아베 총리는 오후 3시35분 1박2일간의 짧은 방한 일정을 끝내고 출국했다.

그는 도쿄에서 BS후지TV에 출연해 “(한국이) 따뜻한 대접을 해주려는 마음을 느꼈다”며 “‘밖에 불고기 먹으러 갑니다’라고 했더니 (박 대통령은) ‘아 그래요’라며 조금 놀라워했다”고 했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