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와 성인의 성(性)관계는 어디까지 합법(合法)의 틀 안에서 용인해야 할까. 미성년자가 만 13세 이상이고 동의 아래 성관계를 했을 경우 성인은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 우리 법은 미성년자의 ‘성적(性的) 자기결정권’을 중학교 1·2학년 즈음인 만 13세부터 인정하고 있다. 13세 미만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는 모두 성폭행(의제강간) 범죄가 된다.
최근 자신보다 스물일곱 살이나 어린 여중생을 임신시켰던 남성이 대법원에 이어 파기환송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자 우리 형법의 성적 자기결정권 규정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성에 대한 판단능력이 미숙한 미성년자의 자기결정권 연령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여론의 난타를 맞는 법원은 답답한 속내만 감추는 형국이다.
◇‘사랑’과 ‘범죄’ 사이…법원의 판단 기준은=2011년 11월 A양(14)은 서울의 한 지하철역에서 B씨(20)를 만났다. 두 사람은 온라인 채팅으로 연결됐다. B씨는 이날 처음 본 A양을 인적이 뜸한 골목길로 유인해 가슴과 엉덩이를 만졌다. 이후 인근 빌라 옥상으로 데려가 추행했다. A양은 한쪽 귀가 잘 안 들리는 장애(청각장애 2급)를 갖고 있다. B씨는 ‘장애인 위계 등 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1심을 맡은 수원지법 평택지원은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 진술이 일관되지 않다는 게 주요 이유였다. A양은 경찰 조사 때 “(B씨가 몸을 만졌을 때)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는데 그냥 가만히 있었다”고 했다가, ‘싫은데 부끄러워서 말을 못한 거냐’는 형사 질문에는 “네”라고 답했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상반된 진술을 해 추행의 강제성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2심인 서울고법 형사11부도 이 판단을 받아들였다. 2심은 “1심 때의 증거를 면밀히 검토해봤지만 무죄 판결이 위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등 대화 내용도 성관계에서의 ‘합의’와 ‘강제’를 가리는 기준이 된다. 지난달 파기환송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연예기획사 대표 C씨도 성관계를 가졌던 D양(당시 15세)과 주고받은 접견 서신·카카오톡 메시지 등이 ‘합의’의 증거가 됐다. 법원은 “‘(C씨를) 사랑한다. 많이 보고 싶다’는 서신 내용 등은 피해자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며 ‘연인관계’였다는 남성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1·2심은 D양을 임신·출산까지 시킨 C씨에게 각각 징역 12년과 9년을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범죄사실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파기환송심인 서울고법 형사8부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검찰이 재상고하면서 이 사건은 다섯 번째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법 원칙과 솜방망이 처벌…외국은 어떻게=‘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미성년자가 피해자인 성범죄 사건은 판사들에게도 ‘뜨거운 감자’다. 특히 범죄사실이 명백히 입증되지 않은 애매한 사건의 경우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토로한다.
서울의 한 형사담당 판사는 “(유죄) 확신이 안 설 경우 욕을 먹더라도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판사는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의 형량이 세진 터라 혹시나 억울한 피해자를 막기 위해 보수적으로 판단하는 역설적 상황도 나올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여변)에 따르면 2013년 6월 전후 아동·청소년 대상 1000여건의 판례 중 74건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또 2013년 1월∼2014년 6월 같은 유형의 판례 1308건 중 항소심까지 간 사건(366건)의 81.7%(299건)가 형이 줄었다.
이에 만 13세인 ‘성적 자기결정권’ 연령을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재 기준 연령으론 미성년자가 자기결정권을 명확히 이해하고 성인을 상대로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미성년자 임신 등이 사회적 문제가 된 선진국에선 의제강간의 기준을 높였다. 미국 일부 주(州)는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18세 이하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처벌하는 이른바 ‘로미오와 줄리엣법’을 시행한다. 자신보다 네 살 이상 어린 12∼16세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할 경우 벌금형과 함께 30년 이상의 유·무기징역에 처하도록 돼 있다. 영국·독일 등 유럽국가도 16세 미만 여성과 성관계는 ‘성적 자기결정권 없음을 악용한 것’으로 본다. 여변 관계자는 2일 “의제강간 기준을 만 16세로 올리는 입법 청원을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기획] 13세와 성관계도 합의했으면 무죄?… 법대로 판결 법원도 “답답합니다”
입력 2015-11-02 21:46 수정 2015-11-02 2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