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기에 걸친 최악의 화약고’ 중동은 왜 평화와는 거리가 먼 땅이 됐을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정을 이끌어내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의 20주기 추모식이 열린 31일(현지시간), 그가 야세르 아라파트 당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과 함께 열었던 중동의 긴장완화 시대는 완연히 종말을 고한 분위기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평화협정의 마지막 장은 젊은 세대가 직접 써야 한다”며 그를 기렸지만 소셜미디어를 기반으로 현실에 소환된 팔레스타인과 아랍 청년들의 분노는 3차 인티파다(반이스라엘 민중봉기)가 임박했다는 우려로 이어지고 있다. 2010년 불어온 ‘아랍의 봄’에 금방이라도 뒤덮일 듯했던 중동 민주화는 불과 몇 년 만에 더 큰 혼돈과 전란으로 귀결됐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싹 터, 아랍의 봄이 저무는 시점에 창궐한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그야말로 ‘바이러스’처럼 중동 전역을 잠식해 버렸다. 군사력 2강인 미국·러시아가 달라붙어도 해결의 실마리는 묘연한 상황이다. ‘역사는 거울’이라는 격언처럼 전쟁의 포화와 반목 뒤에 자리한 갈등의 기원에 눈 돌릴 때다. 종교와 민족, 냉전과 석유, 국제사회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중동 갈등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역시 ‘이스라엘’과 ‘종파 갈등’이다.
◇1800여년 전 역사를 소환해 낸 이스라엘, 피의 건국사=서기 66년에 일으킨 유대인들의 반란이 4년 만인 70년 로마의 손에 진압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세계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옛 터전으로 돌아올 꿈을 본격적으로 꾸게 된 계기는 1917년, 1차 세계대전의 전란 속에 유대 자본의 지원을 노린 영국의 ‘밸푸어 선언’이다. 이후 5차례에 걸쳐 30여만명이 이주한 데 이어 1948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한다.
졸지에 1000년 넘게 살아온 터전을 빼앗기고 난민으로 전락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반발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슬람 세계 한복판, 자신들의 성지이기도 한 예루살렘을 하루아침에 기독교 국가에 빼앗기게 된 아랍국들은 곧바로 이스라엘에 선전포고를 던진다. 현대 중동 분쟁의 시발점이 된 1차 중동전쟁이다.
이집트와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 인접국들을 총망라한 아랍연합군은 압도적인 규모로 개전 초 유리한 국면을 맞았다. 하지만 세계대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면서 전세는 급반전됐다. 유엔의 중재 하에 휴전협정이 이뤄진 뒤 팔레스타인 지역의 56%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의 영토는 휴전 후 80%까지 급격히 확장됐다. 그 결과 80만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나게 됐다.
1956년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반발해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2차 중동전쟁이 벌어졌다. 이집트를 초토화시킨 3개국 점령군은 미·소 양국의 견제로 철군했으나 역내 이스라엘의 영향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스라엘이 시리아와의 비무장지대로 설정됐던 골란고원 일대의 경작을 선언하면서 촉발된 1967년 3차 중동전쟁은 이집트와 요르단이 가세했으나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스라엘은 가자와 예루살렘, 요르단강 서안지역, 골란고원 등 8600㎢를 점령해 독립 초기에 비해 8배가 넘는 영토 확장을 달성했다. 1973년 이집트 시리아 양국이 3차 중동전쟁에서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기습, 4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지만 성과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의 이주민이 양산돼 PLO의 저항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갈라진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예들=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의 갈등이 종교와 민족 간 갈등이라면 이슬람 내부의 종파 분화는 중동 갈등을 잉태한 또 하나의 축이자 보다 유서 깊은 반목이다. 이슬람교를 창시하고 제국을 건설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632년 사망한 이후 무함마드의 혈족으로 이어지던 칼리프의 전통은 4대 칼리프 알리 시대를 맞아 급격히 요동친다. 3대 칼리프인 우스만 살해 이후 656년 칼리프로 등극한 알리는 예언자의 친족이 칼리프의 정통성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해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5년 만에 암살된다.
5대 칼리프 자리에 오른 우스만의 사촌 무아위야가 추대 전통을 거부하고 자식에게 칼리프 자리를 세습할 것을 선언, 우마이야조를 건립하면서 교단은 분열의 길을 걷는다. 무아위야의 지지자들은 ‘순나’(아랍어로 예언자의 본보기)에서 비롯된 ‘수니파’로 불리며 다수를 점했다. 수니파의 견제로 알리의 차남 후세인이 살해당하고 이 소식이 이라크, 이란 지방에 전해지면서 후세인의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인 이 지역 이슬람 정파들은 하나의 종파로 발전하게 된다. 세속적 권력 세습에 반대하고 정통 칼리프제를 주창하는 알리의 추종세력 ‘시아투 알리’(알리의 추종자), 곧 ‘시아파’의 탄생이다.
두 종파는 종교 의식과 이슬람 율법의 해석, 적용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특히 결별의 결정적 원인이 된 후세인의 순교를 기리는 ‘아슈라의 날’이 대표적이다. 시아파는 고행을 통해 순교를 막지 못한 것을 참회하는 의식을 치르는데 수니파는 이를 그릇된 종교의식으로 비난해 왔다. 두 종파 간 갈등의 주요 원인인 시아파의 수니파에 대한 적대적 감정, 또 수니파의 시아파에 대한 이단 비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
[월드 이슈] 지구촌 최악의 화약고 ‘중동’… 종교·민족·종파간 ‘사생결단 충돌’
입력 2015-11-02 18:56 수정 2015-11-02 2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