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7월 26일 오전 8시 헤론 의사는 이질로 20일 간 앓다가 사망했다. 내한 5년 만이었다. 축적된 과로의 연속이었고 대신할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휴식 없이 수많은 환자를 돌봤다. 게다가 제중원의 재정 부족과 왕실 진료에서 오는 스트레스, 두 딸을 낳은 부인의 산후 질병으로 인한 고통, 좌골 신경통으로 허약해진 몸, 열악한 위생 환경에서 걸린 이질이어서 치명적이었다.
당시 서울의 위생 상태는 1888년 3월에 도착한 가드너 부부가 바로 사임하고 떠난 데서 알 수 있다. 가드너는 서울을 보자마자 사임했다. 헤론이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가드너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두 딸을 낳은 헤론 부인이 산후 건강이 좋지 않아 6개월 이상 병상에 있으면서 사경을 헤매었다. 벙커 부인은 폐병으로 고생했다. 감리회 이화학당 교사 로드와일러 양과 보구여관 하워드 여의사는 질병으로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0년 4월 호주장로회의 데이비스 목사가 부산으로 전도여행 중에 천연두로 사망하여 선교사 중 첫 순직자가 되었다. 이어서 7월에 헤론이 이질로 사망했다. 1891년 3월에는 언더우드 부인이 심한 관절염에 걸려 부부가 안식년을 떠나야 했다. 1888∼1891년 3년 동안 질병으로 4명이 사임했고, 2명이 사망했다. 2명은 병가를 기록했다. 초기 선교사들의 최대 적(敵)은 질병이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히다
일본과 조선의 조약 이후 구미 열강과의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부산(1876), 원산(1882), 인천(1883) 항이 개항될 때, 정부는 거류지에 일본인 묘지 등 외국인 묘지를 위한 부지를 하사했다. 부산에는 용두산공원 쪽으로 묘지와 신사를 만들었고, 원산에서는 일본인 거주지 쪽 뒷산에 일본인 묘지를 만들었다. 인천에는 북성동의 서양인묘지, 율목동 일본인묘지, 중국인 묘지 등이 주어졌고, 청일전쟁 때 많은 전사자가 나오면서 규모가 확대됐다. 그러나 서울은 공식 개항장이 아니고, 4대문 안과 도성 주변에는 매장이 금지되어 외국인이 사망할 경우 인천까지 운구해야 했다. 외국인 수가 늘어나자 1890년 봄 프랑스공사관에서는 외국인 장지를 마련해 줄 것을 조선 정부에 요청했다. 그 교섭은 헤론의 사망으로 급진전 됐다.
헤론이 순직하자 미국공사 허드는 알렌 서기를 외무부에 보내 장지 지정을 요청했다. 여름이어서 시체가 부패했기에 다음 날 일단 정동에서 장례를 치르고, 불법이지만 헤론가(家) 뒷마당에 가매장했다. 제안된 한 장지가 무산되자 정부의 결정을 독촉하기 위해서였다. 7월 28일 정부는 양화진을 제안했다. 알렌과 언더우드는 양화진을 방문한 후 수용했고, 오후에 정동에서 20리 떨어진 양화진에서 하관예배를 드렸다.
양화진 외국인묘지에는 이후 주로 선교사들이 매장됐다. 특히 태어나자마자 죽은 여러 유아들의 무덤이 한 편에 마련되었다. 선교사들은 어린 아이들을 먼저 묻으며 양화진 언덕을 한국의 ‘막벨라동굴’로 생각했다. 가족과 동료의 뼈가 묻힌 한반도가 그들의 고향이 되었고, 그들도 뼈를 묻기 위해 헌신했다.
양화진은 또 그들의 ‘갈보리’였다. 매년 가족이나 동료의 관을 메고 양화진 언덕을 오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훈련을 했다. 그 언덕은 또한 부활의 언덕이었다. 동료를 묻을 때마다 부활의 믿음과 소망을 고백하며 서로를 격려했던 신앙고백의 언덕, 달려갈 길을 마치고 영광의 면류관을 쓴 감사의 언덕이었다. 막벨라와 갈보리가 만나고 눈물과 부활과 감사가 만난 그 언덕이 있었기에 오늘 한국교회가 있다.
제중원과 근대 의학, 가족의 헌신
헤론은 한국의 첫 근대병원인 제중원의 2대 원장으로서 구리개 제중원을 본 궤도에 올려놓았다. 백내장 수술, 4.5㎏의 혹 제거 수술 등 외과 수술을 도입했고, 콜레라 예방 조치와 천연두 예방접종 등 위생 사업을 실시했다. 여자 간호사와 여자 의사로 부인과를 운영했고 한국인의 질병을 근대적 질병 체계에 따라 분류하고 명명했다. 의학교를 개설해 한국인 의생을 교육했다. 그의 이런 노력이 3대 원장 빈턴에 의해 잠시 위기를 맞았으나, 4대 원장 에비슨에 의해 계승되면서 1904년 남대문밖 제중원(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했다.
병상에서 헤론과 언더우드는 화해하고 우정을 회복했다. 언더우드 부부는 20일간 정성을 다해 간호했고 임종을 지켜보았다. 후임인 빈턴 의사는 구리개 제중원에 복음 전도 기능이 없는 것을 비판하고, 재정적 지원이 불규칙하고 타락한 정부 관리들이 많은 정부 병원인 제중원을 포기하고 남대문 밖에 순수 선교 병원을 건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언더우드와 알렌, 뉴욕 선교부의 엘린우드 총무는 빈턴의 돌발적인 행동을 비판했다. 이들은 각국 공사관이 노리는 제중원 원장 자리가 가지는 선교적 가치를 중시하고, 캐나다에서 에비슨 의사를 초청했다. 에비슨과 언더우드는 헤론의 기독교문명론(장기적인 기독교 국가 설립을 위한 기독교 기관 운영)과 네비어스정책(직접 전도와 토착교회 설립)이 함께 가는 통합 노선을 발전시켜, 1897년 기독교 종합 교양지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했고, 1904년 세브란스병원을 건립했다.
해리어트 헤론 부인은 1891년 여름 남한산성 수어장대에 오를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당시 총각인 마페트와 게일이 부인을 흠모했다. 부인(32세)은 문학적이고 다정다감한 게일(29세)과 1892년 4월 7일 결혼하고, 알렌과의 감정이 남아 있는 서울을 떠나 새 선교 지부인 원산으로 가 두 딸(새라 앤 6세, 제시 4세)을 함께 키우며,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했다. 게일은 앤과 제시의 성을 바꾸지 않고 헤론의 딸로 키웠다. 게일 부부는 1899년 9월 9일 서울 연동으로 돌아왔다. 부인은 다시 건강이 나빠 스위스에서 휴양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년 서울에서 결핵으로 사망하고 양화진 남편 곁에 묻혔다. 앞서 첫째 딸 새라 앤은 첫 2세 선교사로 서울에 파송됐으나 양화진에 어머니를 묻은 후 외교관과 결혼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옥성득 교수(美 UCLA)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10·끝) 헤론의 사망과 그의 유산
입력 2015-11-02 20:00 수정 2015-11-02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