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순 독일 외무부 초청으로 독일의 사회통합 정책과 관련한 국제 언론인 세미나를 다녀왔다. 15개국에서 16명이 참석한 행사였다. 각국 언론인과 대화하면서 들은 것 중 인상적이었던 게 각 나라 사람들이 쓰는 언어 얘기였다.
베네수엘라에서 온 여기자는 스페인어가 모국어인데 영어가 능수능란했다. 그녀는 “미국과 가까운 중미 나라들은 어려서부터 미국 방송을 보기 때문에 다들 영어를 잘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스페인어를 하면 포르투갈어를 90% 이상 알아듣고, 언어가 유사해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배우는 젊은이들도 많다고 소개했다.
베트남에서 온 여기자는 “우린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젊은 베트남인은 중국어를 거의 필사적으로 배운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 프랑스 식민지 경험도 있어 불어를 잘하는 젊은이도 많다”고 설명했다. 영어는 어떨까. 베트남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해외에서 일을 해 돈을 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영어는 기본으로 배운다고 했다.
헝가리에서 온 여기자는 독일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했다. 영어도 거의 완벽했다. 중·고교 때 배운 것이라고 했다. 장차 커서 독일이나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살거나 직장을 다닐 가능성이 있기에 자국민들은 어려서부터 두 언어는 기본으로 배운다고 말했다. 에스토니아 출신 기자와 크로아티아 기자도 자국어 외 독일어와 영어를 구사했고, 에스토니아 기자는 러시아어도 잘했다. 마찬가지로 영향력이 큰 유럽권 국가의 언어를 어렸을 적부터 습득한 결과였다.
키르기스스탄 기자는 러시아어가 모국어 수준이었다. 키르기스스탄에는 인구의 4분의 1 정도가 러시아 출신 이민자라고 했다. 그의 부인도 러시아 여성이었다. 이 나라 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대부분 러시아에서 일하기를 원해 러시아어를 자연스레 익힌다고 말했다. 중국과 접경한 탓에 최근에는 중국어를 열심히 배우는 자국민이 많아졌다고 소개했다.
아프리카 말리에서 온 여기자는 프랑스 지배를 받은 역사 때문에 불어를 잘했고, 제2외국어로 영어도 배웠다고 했다. 가나 출신 기자는 영국 식민지 지배 탓에 가나의 모국어가 영어라고 소개했다. 파키스탄에서 온 40대 여기자 역시 파키스탄은 모든 공공문서에 영어를 쓰기에 영어는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했다. 영어를 잘하기에 어려서부터 해외에 나가 일할 생각을 한다고 했다.
언론인 이외 유일하게 교수 자격으로 세미나에 참석한 캐나다 대학의 한 교수는 자신은 사실 프랑스인인데 캐나다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어차피 언어(불어)가 같고, 또 자신은 영어도 잘해 캐나다 어디에서든 일할 수 있어서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기자 역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호주인데, 같은 영국 연방에 속해 있고 언어(영어)도 같아 남아공에서 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 밖에 다른 기자들도 모국어 이외 한두 가지씩의 언어는 다들 능숙했다.
2개 언어만 써도 경쟁력이 있던 바이링구얼(bilingual) 시대를 넘어 여러 언어를 쓰는 멀티링구얼(multilingual) 세상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평생을 살면서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하거나 살아가는 곳이 비단 한 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 차원에서 미래 세대들에 어려서부터 멀티링구얼 능력을 키워주는 일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에서만 공부하고 일하고 또 100세를 살아가기엔 너무 단조롭지 않은가.
손병호 국제부 차장 bhson@kmib.co.kr
[뉴스룸에서-손병호] 멀티링구얼 세상
입력 2015-11-01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