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두만강가나 백두산 자락에서 만난 탈북자들을 돕기로 했다. 당시 백두산 자락에서는 조선족들이 약초를 재배하고 있었는데 그중 인정 많은 조선족 한 분이 식량을 얻으러 온 탈북자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곤 했다. 하지만 금방 소문이 나 찾아오는 탈북자가 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우리는 산 아랫자락에 자리 잡은 움막에 함께 머물면서 탈북자들의 끼니를 챙기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2시쯤 한 탈북형제가 문을 두드리며 움막으로 들어왔다. 전날 옌볜을 다녀오며 장시간 이동을 했던 나는 조선족과 얘기를 나누는 그의 실루엣과 그가 데려온 작은 짐승을 누운 채로 바라봤다. 잠에 취해 몽롱한 상태여서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작은 몸뚱이에 앙상한 척추가 살갗 밖으로 드러나 있어서 ‘웬 치와와를 데려왔나’ 싶었다. 피로가 누적돼 있던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 어젯밤 희미한 기억 속에 있던 짐승을 자세히 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치와와라고 생각했던 동물은 다름 아닌 돼지였다. 어안이 벙벙한 내 표정을 보고 탈북형제는 쑥스러운 듯 두 손을 부비며 말했다.
“제 딸이 평양에 있는 예술학교에 다니고 우리도 북에서는 나름 먹고 살 만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으로 식량난이 계속되니 참…사람들도 못 먹고 사는 판에 돼지를 잘 먹일 수가 없어 돼지가 이름값도 못하게 됐습니다.”
조선족에게 그냥 도와달라는 게 민망해서 집에서 애지중지 기르던 돼지를 가져온 것이었다. 내가 “돼지가 어떻게 꿀꿀거리지도 않았느냐”며 용하다고 했더니 그는 말했다.
“술을 먹여서 돼지가 취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놈 때문에 적발이라도 되면 큰일이지요. 조금 있으면 깰 텐데 힘들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돼지는 잠에서 깨어났고 계속 “꾸엑”거리며 구토를 했다. 우리는 일단 속병을 앓는 돼지를 위해 죽부터 끓여 먹여야 했다.
국경에서 만난 탈북자들 중에는 식량이나 물품을 얻어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돌아가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체제의 두려움을 느끼며 목숨을 내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억지로 사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옌지에 아파트를 얻어 준비되지 않은 통일살이를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늘어난 가족은 어느덧 열 명을 훌쩍 넘겼다.
어른들은 한동안 긴장하며 우리의 정체에 의심을 품었지만 아이들은 금방 마음을 열어 친해졌다. 북한에서 어른들을 도와 밥을 지을 때 땔감을 구해오던 아이들은 집안에서 단추만 눌러 불을 켜는 가스레인지와 전기밥솥을 보고는 “우와. 여기선 우리가 나무하러 가지 않아도 되네요”라며 신기해했다. 아이들이 가장 행복해 했던 것은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에선 늦은 밤이나 추운 날 야외 공동화장실 가는 게 무섭고 불편했을 뿐 아니라 급해서 뛰어가도 여러 사람이 줄을 서 있으면 낭패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밥상에 올라오는 고추와 옥수수의 크기를 보고서도 놀라워했다.
“선생님, 이거 사자고추(피망)예요? 그냥 고추예요? 이 강냉이(옥수수)는 왜 이리 커요? 남조선 것도 이만해요? 우리 북조선의 야채들은 세 개를 훔쳐 먹어도 배가 안 부른데 여기 것은 한 개만 먹어도 배부르겠어요(웃음).”
북한은 땅의 지력이 다해 농작물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2배 이상 큰 중국의 채소들을 보며 아이들은 놀라고 신기해했다. 아이들의 순수한 반응들은 언제 잡혀갈지 몰라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하던 어른들에게 웃음과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역경의 열매] 조명숙 <6> 백두산 자락에 움막… 탈북자 끼니 챙겨주기 시작
입력 2015-11-01 1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