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도 애독했던 헤른후트 로중 묵상집을 아시나요?… 병사가 암호처럼 성경구절 뽑아 영적 무기 삼아

입력 2015-10-29 22:48
독일 작센주에 있는 헤른후트 공동체의 전경. 홍주민 목사 제공
로중을 애독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홍주민 목사 제공
한국어로 번역된 2016년 헤른후트 로중 '2016 말씀, 그리고 하루'. 홍주민 목사 제공
1731년 처음 세상에 나온 로중.
독일의 개신교 공동체 ‘헤른후트’ 구성원들은 매일 아침 ‘로중’으로 묵상을 한다. ‘제비 뽑는다’는 뜻의 동사 로젠에서 파생된 명사 로중은 암호를 뜻한다. 전쟁터의 병사가 절대 잊어선 안 되는 암호처럼 하루의 말씀은 신자에게 영적 무기나 다름없다는 의미다.

암호처럼 짤막한 구약 말씀 한 구절을 ‘하루의 로중’이라고 부른다. 이에 상응하는 ‘가르침의 본문’으로 신약의 한 구절이 같이 적혀 있다. 말씀에 대한 해설은 없다. 신앙의 선조들이 남긴 짤막한 글이 달려 있을 뿐이다.

이런 묵상의 전통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헤른후트는 ‘주님이 보호하시는 곳’이란 뜻으로 초기교회의 신앙을 추구하는 경건 공동체다.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후예들이 생명의 위협을 피해 떠도는 것을 보고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폰 진젠도르프 백작이 자신의 사유지를 안식처로 제공하면서 탄생했다.

로중은 1728년 소그룹 모임에서 진젠도르프 백작이 다음날 묵상할 말씀을 정해 구성원들에게 건네면서 시작됐다. 초기에는 매일 구약 1800개 구절 중 제비뽑기로 하루의 로중을 정했다고 한다. 책이 나온 건 1731년부터. 2년 뒤에는 하루를 정해 1년 동안 묵상할 말씀을 미리 뽑은 뒤 편집위원들이 기도하며 신약 말씀을 찾는 방식으로 책을 만들었다.

출간 이후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으며 내년에 사용할 286번째 책도 나왔다. 독일에서는 성탄절과 새해 선물로 주고받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묵상집이다. 55개 언어로 번역돼 유럽 아프리카 미국 등 세계 각국의 기독교인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20세기의 행동하는 신학자로 유명한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도 로중 애독자였다. 그가 남긴 기록물에선 삶의 기로마다 로중을 붙잡고 고민하며 기도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939년 6월 21일 미국에 머물던 그가 안전하게 미국에 머물 것이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독일로 갈 것이냐를 두고 고민하던 즈음 기록한 일기가 대표적이다. 그는 그날의 로중 ‘말라기 3장 3절’을 두고 묵상한 뒤 “하나님은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신다. 나는 나를 더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아신다. 결국 모든 행동과 실천은 분명하고 깨끗하게 될 것이다”고 적었다. 독일 행을 택한 그는 1945년 4월 나치 정권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는 처형되는 날 아침까지 감옥에서 로중으로 묵상하고 예배를 드렸다.

한국에서는 94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 유학할 때 이 책을 접하고 간결함과 깊이에 반한 한국디아코니아연구소 홍주민 목사가 2009년부터 번역해 소개하고 있다. 로중의 판권을 사서 번역과 감수까지 하고 있는 그는 최근 내년도 ‘로중’의 번역본 ‘2016 말씀, 그리고 하루’를 교보문고 등 시중 서점에 배포했다. 올해는 허우정 박사 등 4명도 번역에 참여했다.

내년도 연중 말씀은 이사야 66장 13절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겠다'"로 번역했다.

홍 목사는 29일 "로중은 기독교 초기 생활공동체를 지향하는 헤른후트 사람들이 개혁적인 삶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영성의 근원"이라며 "정해진 해석이 없어 개인이 자유롭게 묵상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다르다"고 말했다.

홍 목사는 책을 위해 세 차례 헤른후트 공동체를 방문했다. 오는 12월에는 독일에서 열리는 평화대회에 참석할 북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통해 북한 교회에도 20권을 전달할 계획이다. 그는 "평화를 위한 디아코니아 차원에서 이 책이 북한 기독교인들에게도 좋은 영성 묵상의 기회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