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손을 잡아요

입력 2015-10-30 18:34

아침에 라디오에서 문득 들었다. 인간이 직립보행으로 진화한 것은 도구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손을 맞잡기 위해서라고. 최근에 내가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다. 굳이 진화 이야기에 반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아기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필요한 것은 아이의 두 손을 붙잡아주는 어머니의 손이니까. 그런데 커서는 사정이 다르다. 병원에서 다시 걷게 되는 재활치료를 받는 사람들은 사람의 손보다 지지대를 더 의지한다. 왜 사람의 손이 아닌가?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와 어머니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이 더 크고 강한 손이 잡아주어야 한다. 성인은 덩치가 커서 그렇게 잡아줄 손이 많지 않으니 지지대가 더 나은 셈이다. 하지만 그런 재활의 수준이 아니라면 손이 낫다. 연약한 손이어도 괜찮은 상황이 많다. 영어로 “손을 드릴까요?”는 “도와드릴까요?”라는 의미다. “제 손을 잡으세요”는 정말 잡으라는 말이지만 “도와드릴께요”와 “함께 해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사 59:1∼2)

나는 “괜찮습니다”를 당연하게 말하는 식으로 자라왔다. 누군가가 도와주려고 하면 나는 부드럽게 괜찮다고 말하지만 야박하게 표현하면 “아니요, 됐습니다”하고 거절을 하는 것이다. 나는 서로 의지하는 모습보다 홀로 건강하게 서는 모습이 더 낫다고 익혀왔다. 그래서 거기에 부응하여 비교적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왔다. 나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의 독립적인 성향을 인정해주고 좋게 봐준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실존을 애써 부정하고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교회는 이상을 목표로 하지만 중요한 건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기를 향하지만 항상 현실은 ‘죄인’의 속성에서 별로 진보하지 못한다. 차라리 진화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냉정한 실존 가운데 서로의 더러운 것을 닦아주고 서로 손을 잡아주는 것이 현실 교회인데 너무 좋게만 포장하려고 하다 보니 교회가 본연의 모습은 뒤로 하고 자꾸 목표에만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 3:6∼7) 우리 교회들이 이 본문을 설명할 때 나면서 못 걷던 이가 걸었다는 것이 핵심이고 베드로가 가진 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도 그렇게만 생각을 했다. 그런데 조금 보충을 해야 할 것 같다. 목회자 백 명 중에 그런 능력을 나타낼 사람은 냉정히 한 명 있을까 말까이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해야 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늘 있던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시각, 그리고 “우리를 보라”고 말했던 교류하려는 의지, 무엇보다도 손을 잡아 일으켜보려고 손을 뻗는 실천이다. 설령 그래서 그가 못 일어난들 어쩌랴. 그 실천이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경험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알릴 것이다. 내가 교회를 세운다면 그렇게 손을 뻗는 소박하고 현실적인 실천을 하리라 다짐해본다.

최의헌 <연세로뎀정신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