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신혼여행차 방문했던 중국에서 접한 탈북자들의 현실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들이 당면한 현실은 그동안 외국인 노동자 지원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안타까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남편과 잠시 귀국해 본격적으로 탈북자들을 돕기 위한 여정에 돌입했다. 그동안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온전하게 외국인 노동자 사역에 열정을 쏟아 좋은 결과들을 얻었듯이 탈북자 돕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렸다. 그런데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어느새 나는 외국인 노동자 사역 전문가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이런 사역을 두고 다시 바닥부터 고생하며 목숨까지 위협받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두렵기도 했다. 그동안 쌓아올린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남편은 나보다 과감했다. 결국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다른 단체들에 맡기고 남편의 뒤를 따라 중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중국교포들의 소개로 탈북 형제들을 만났다. 그들의 현실을 보고 잠시나마 투덜거렸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들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형편이 어려울 뿐 공포는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탈북자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공포가 심했다. 백두산 숲에서 만난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었지만 그 눈빛은 사냥꾼에게 몰려 떨고 있는 여린 생명체 같았다. 한번은 옌볜에서 한 노(老)교수가 내게 꼭 보여줄 게 있다며 뒷산으로 데려갔다. 그곳엔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그 앞에는 플라스틱 그릇과 잡다한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노 교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우리 민족이 이렇게 처참하게 살았던 적은 없습니다. 지금 북한 여성들은 전쟁 상황도 아닌데 참담한 일들을 겪고 있습니다. 일제 때는 우리 민족이 힘이 없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여성들을 돕지 못했지만, 지금 우리들은 힘이 있음에도 북한 여성들을 도울 마음이 없어요. 그러니 이렇게….”
당시 한국에 코리안 드림을 안고 입국한 조선족 중 대부분은 위장 결혼으로 비자를 받아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그 수입이 상당했기에 중국 동북3성(지린·랴오닝·헤이룽장)의 결혼 적령기 여성들이 한국으로 몰리면서 결혼시장에 균형이 깨졌다. 그때 인신매매단이 중국으로 식량을 구하러 탈출한 북한 여성들을 결혼시장에 팔아넘겼다. 인신매매단을 피했던 탈북 여성들은 산속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 이를 알게 된 사람들이 먹을 것과 돈을 주면서 그들을 유린했다. 그 현장을 노교수의 인도로 내가 본 것이다.
움막 앞에서 충격에 빠져 있던 내게 한 조선족이 “두만강 인근에 시체 한 구가 있는데 그걸 찍어서 신문에 기사로 내면 사람들이 북한의 현실을 알고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를 따라 두만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두 눈을 의심할 만큼 끔찍한 현장을 목격했다. 물 위에 뜬 시체를 까마귀들이 물어뜯고 있었다. 그 조선족은 내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조 선생,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소? 선생이 믿는 하나님은 이 광경을 어떻게 보시겠소? 북한 사람들은 너무 못 먹어 두만강을 건너다가 넘어지고 빠져 죽습니다. 까마귀는 그 살을 뜯어 먹지요. 남한 사람들은 중국에 보신 관광을 와서 까마귀가 정력에 좋다고 한 마리에 10만원씩을 주고 삶아 먹데요. 이 현실을 선생이 믿는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나는 아픈데 형제인 너는 어떠하냐.”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역경의 열매] 조명숙 <5> 탈북자 처참한 현실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울 뿐…
입력 2015-10-29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