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는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통치하던 한국을 겪었다. 초등학교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선생님에게 회초리를 맞았고, 걸핏하면 군인들이 동네 근처 대학교 정문을 굳게 닫은 채 대학생 형·누나들의 책가방을 뒤지는 풍경을 보며 자란 세대다. 아무리 지금의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무역대국이고, 선진국 수준의 국격을 갖게 됐다 해도 그 시절의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운 나라로 여기진 못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현재와 과거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진 않는다. 수십년의 군사독재 터널을 통과한 나라가 이렇게 성공한 자유민주국가가 된 데 대해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가장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던 때는 오히려 대학 시절이었다. 초·중·고 국사 국정 교과서에선 읽어보지도 못했던 한국 근현대사를 피가 끓던 청년이 돼서야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급진적이었는지 모른다. 좀 더 일찍 배웠다라면 20대를 좌파로 지내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취직을 했고, 결혼해 아내와 자식이 생겼으며, 부모세대의 생계 걱정을 똑같이 하게 됐다. ‘진짜’ 삶을 살게 되자 좌파였던 우리는 천천히 우파가 됐다. 정의는 하나뿐이라고, 정답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던 단순한 사고방식도 변했다. 인생의 정답이 단 하나밖에 없는 건 아니며,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내 것만큼이나 존중해야 한다는 걸 몸으로 체득했다.
이른바 ‘수도권 보수층’.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말까지 대학을 다녔고, 이 나라의 급속한 발전과 가장 가까이 동화(同化)돼 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 대다수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7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선보였던 특유의 ‘레이저광선’ 눈빛과 큰 목소리에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북·종북 일색인 지금 교과서를 바로잡는 유일한 방법은 국정 역사 교과서 단 한 가지’라는 대통령의 메시지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검인정 교과서에 좌편향 내용이 있다고 해서 정부가 만든 단 한 종의 교과서만 아이들에게 가르치게 할 수는 없다. 지금 정부가 보는 우리의 과거사만이 정답이라고 내 아들에게 주입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좌편향 내용이 문제라면 그걸 고치면 될 일이다. 어떻게 고칠지 토론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방법과 절차는 많다. 민주주의란 게 그런 것 아닌가. 효율적이지 않다고 해서 절차를 생략하고 다양한 방법을 무시하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게 민주주의다.
미국 역사 교과서에는 거의 300년을 지속했던 인종차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걸 배우는 미국 청소년들이 조국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뉴질랜드 백인은 자신들이 정복한 원주민 마오리족의 역사와 마오리족을 어떻게 정복했는지도 상세히 배운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나라인 호주사람, 그중에서도 백인들을 무식하다고 경멸한다. 호주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백인이 원주민 애버리진족을 전멸하다시피 학살한 역사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은 미래세대에게도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 해방 전후의 좌·우 대립도, 이승만정권의 무리수들도, 친일파의 행적도, 5·16쿠데타도, 박정희 군사독재도, 전두환 파시즘도 말이다. 1945년 이후 세상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왕국이 된 북한의 세습 전체주의도 말이다. 박 대통령이 일본 총리 아베 신조에게 늘 하는 말처럼 아픈 과거사와 정면으로 마주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반성과 함께 밝은 미래를 열 수 있으니까.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
[세상만사-신창호] 정답이 하나라는 대통령
입력 2015-10-29 1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