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수능이라고 불리는 시험을 예전에는 학력고사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한 사람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고 또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측정하는 일이 가능한지,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인지 애매한 측면이 있다. 아무려나 수능이든 학력고사든,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수험생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할 때 늘 하는 말이 있다. 교과서로만 공부했다는 것.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없을 것이다.
“교과서 같은 건 읽어본 적이 없다.” “교과서는 수업시간에 베개 역할을 할 뿐이니 적당한 두께로 표지를 더 부드럽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자체를 조롱하는 말들이 이따금 들린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여전히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좋은 나이에 그 많은 시간 동안 교실에 앉아 다른 책을 읽거나 교과서를 베고 잤을 것이다. 지금은 누가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열심히 따져 물을지도 모르고, 언쟁을 할 때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것을 강력한 논거로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흑백TV를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공부하던 국정 교과서 세대가 보여주는 모순이다.
아들이 사춘기 때 자주 했던 질문이 있다. “왜 세상은 책에 씌어 있는 것과 다른 거예요?” 사람은 지향하는 바와 실제 행동이 다른 경우가 많으니까. 어쩔 수 없이 과거에 속하는 영역인 지식이라는 것을 언어로 기록하는 책은, 어떤 책이든, 현실과 일치할 수 없는 운명이니까. 그래서 현실과 거리를 좁히고 밀착하려면 역설적으로 더 많은 책이, 더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다. 하지만 비판적 사유 없이, 남다른 관점 없이, 특정 사상과 지식만 강요하는 책을 무슨 재미로 읽을까? 그런 책은 죽은 것이다.
교과서 따위를 누가 읽느냐며 조롱하는 태도는 죽은 책으로 공부를 강요당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런 태도 또한 죽은 책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한다. 책의 죽음은 지성의 몰락과 궤를 같이하고, 그 결과가 무엇일지는 역사책에 나와 있다.
부희령(소설가)
[살며 사랑하며-부희령] 교과서 유감
입력 2015-10-29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