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deep] 보조금의 함정… 쌀값 폭락 부추기는 ‘票퓰리즘’

입력 2015-10-28 22:26
올해도 어김없이 쌀 수확기에 논을 갈아엎는 농민단체의 시위 모습이 등장했다. 쌀값 폭락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과 정부에 대책을 촉구하는 정치권의 모습, 부랴부랴 수급 대책을 내놓는 정부의 대응도 수년째 판박이다. 수요보다 공급이 훨씬 많은 시장 불균형으로 쌀값 폭락 사태는 2000년대 초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정치권과 정부, 농민 모두 근본적 해결 방안을 도출하기보다 그때그때 각자 수지타산에 골몰해 왔다. 그 결과 농민들은 울상이고, 정부는 남는 쌀을 처리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는 등 모두가 손해 보는 일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표(票)퓰리즘’ 정치권=국회는 쌀 시장의 수요와 공급 기능 조정을 고민하기보다 직불제로 일단 농민들의 소득을 보전해주는 데 초점을 맞춰 왔다. 지난해 1월 국회는 변동직불제의 기준이 되는 쌀 목표가격을 기존 80㎏당 17만83원에서 10% 올려 18만8000원으로 결정했다.

당시 농림축산식품부는 17만9686원을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한 발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정부를 배제한 채 여야 간 합의로 가격을 결정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28일 “목표가격을 지나치게 높게 올리면 단기적으로 농가 소득은 늘겠지만 장기적으로 쌀산업의 효율화와 구조조정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여야를 설득했지만 실패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쌀 농가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전국 쌀 평균가격과 목표가격 차액의 85%를 변동직불금 형식으로 지급하고 있다. 쌀 직불제는 농가를 위한 안전장치이지 이것만으로는 농가소득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국회 역시 이를 알고는 있다. 국회 농해수위 소속 모 의원실 관계자는 “농촌이 지역구인데 쌀 문제를 논리적으로 대응하면 다음 선거는 포기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조금에 안주하는 농민=수확기 쌀값은 매년 하락세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2013년 80㎏당 17만4707원이던 쌀값은 지난해 16만6198원으로 떨어졌고, 올해는 15만원대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목표가격(18만8000원) 대비 농가 수취액 비중은 2013년 99.7%, 지난해 98.3%였다. 쌀값이 아무리 폭락해도 변동직불금제로 정부가 이를 보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쌀 목표가격은 생산비보다 높다. 우리와 유사한 직불제 정책을 운용하고 있는 미국은 목표가격이 생산비 수준이다.

변동직불금은 쌀농사를 지어야만 지급 대상이 된다. 농민 입장에서는 다른 작물을 심었다가 실패하느니 차라리 가격이 아무리 떨어져도 그 차액을 직불금으로 보전받을 수 있는 쌀농사를 짓는 게 유리하다. 농촌경제연구원 김종인 연구위원은 “직불제가 농가소득 보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쌀농사의 규모화 등 구조조정에 역행하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국회·농민 틈에 끼여 휘둘리기만 한 정부=정부는 매년 쌀 수확기에 수급 안정책을 내놓고 있다. 올해도 지난 26일 20만t을 시장에서 격리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대책을 발표했다. 쌀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근본적 해결 방안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회와 농민 틈에 끼여 소신 있게 관련 정책을 펴지 못한다. 대표적인 예가 2004년 쌀 관세화 유예 조치다. 당시 농민단체와 정치권은 쌀 관세화 유예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정부는 당초 실익이 없는 유예보다 관세화를 염두에 뒀지만 포기했다. 결국 이로 인해 늘어난 쌀 의무수입 물량이 계속 쌀값 하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당시 정부는 2014년까지 10년간 관세화 유예 조치를 연장하는 대신 20만t이던 쌀 의무수입 물량을 매년 8%씩 올려야 했다. 지난해 의무수입 물량은 10년 전에 비해 배로 늘어난 40만t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언젠가 해야 할 관세화였다면 그때 했으면 지금 같은 쌀 공급과잉 현상이 조금은 완화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이제라도 농민들과 정치권의 반발을 두려워하지 말고 쌀 적정 생산을 위한 근본적 해결 방안을 내놔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국책 연구기관 관계자는 “농식품부가 내부적으로만 ‘쌀에 정부 돈이 과잉 투자되고 있다’는 볼멘소리만 하지 말고 이를 공론화하면서 쌀 생산시장 구조조정에 착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세종=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