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 ‘제주올레’ 서명숙이 들려주는 해녀 이야기

입력 2015-10-29 17:42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해녀들을 주제로 사진 작업을 해온 작가 강길순이 찍은 할머니. ‘해녀의 노래’는 제주도 소설가 현기영이 가사를 쓰고 제주 출신 아버지를 둔 재일교포 뮤지션 양방언이 곡을 붙인 노래로 2013년 만들어졌다. 북하우스 제공
제주도가 인기다. 여행객이 몰려들고 이주자들도 늘어난다. 제주도를 다룬 책들도 쏟아진다. ‘제주도 열풍’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서명숙(제주올레 이사장)이다. 그는 제주여행의 패러다임을 바꿨고, 제주의 가치를 재규정했다. 그를 올레길을 만든 이로만 봐선 안 된다. 제주를 주제로 한 책을 꾸준히 쓰면서 제주의 정수를 소개해 왔다.

8년 전 제주올레가 시작됐을 때, 올레꾼들은 서명숙의 책 ‘놀멍쉬멍걸으멍’(2008년)을 들고 길을 걸었다. 그 다음에 쓴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2010년)은 제주도 열풍을 상징하는 책이 됐다. 2012년 출간한 ‘식탐’에서는 제주의 먹거리를 조명했다. 서명숙이 이번에 들고 나온 얘깃거리는 해녀들이다. 제주 여행자들이 바다만 보고 해녀들을 보지 않는 게 안타까웠던 것일까.

“그렇게 참았던 숨, 혹은 가슴으로만 쉬던 숨을 그녀들은 물 위로 떠올라 자기의 테왁을 잡고서야 비로소 길게 길게 내쉰다. ‘호오이 호이이’. 그게 바로 숨비소리다. 혹시 들어봤는가? 바닷가 올레길을 걸어갈 때 먼바다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그 소리를?”

해녀들의 세계에는 오래되고 그윽한 이야기들이 고여 있다. 목숨을 거는 고단한 노동을 통해 당당하고 자유로운 삶을 쟁취해낸 여성들의 세계, 개인사와 시대사의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낙천성과 낭만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세계, 지금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공동체의 미덕을 간직한 세계이기도 하다.

책은 몇몇 현역 해녀들의 인생사로 시작해 해녀의 역사와 문화 속으로 들어간다. 마지막은 저자가 최고령 학생으로 입학해 경험한 해녀학교 체험기다. 제주 해녀의 현재-과거-미래를 돌아보는 구성이라고 하겠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해녀들의 삶을 과장하지 않고 최대한 경쾌한 필치로 그려낸 점에 일단 점수를 주고 싶다. 자료와 취재를 통해 해녀의 역사를 공들여 복원해낸 노력도 평가할 만하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맞섰던 1931∼32년 ‘제주 해녀항쟁’, 전라남도나 강원도는 물론 일본, 중국, 더 멀리는 러시아까지 물질을 하러 나갔던 ‘출가 해녀’, 4·3 사건으로 남자들을 다 잃어버린 해녀마을 ‘무남촌’, 마을의 유일한 학교가 불에 타버리자 미역을 따서 다시 학교를 세운 ‘해녀학교’ 이야기 등이 펼쳐진다.

해녀 문화에 대한 보고는 이 책의 핵심을 이룬다. 해녀는 하군, 중군, 상군, 대상군으로 엄격하게 구분되는데 그 기준이 되는 게 바로 숨이다. 숨이 길어야 깊은 바닷속에 들어갈 수 있고, 그 기량에 따라 그녀들의 바다가 정해진다.

저자는 “중군, 하군이 상군의 바다에 가서도, 거꾸로 상군이 중군, 하군의 바다에 들어가서도 안 되는 게 해녀들의 불문율”이라며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대기업이 중소기업, 골목상권까지 위협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키 힘든 공정사회의 룰”이라고 평가했다.

해녀들은 지금도 공기통이나 호흡기 같은 장비를 쓰지 않는다. 해녀들은 단순히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첨단장비로 무장한 어선들이나 스킨 스쿠버들과 싸우면서 자신들의 방식을 지켜낸 것이었다. 그들은 지속 가능하려면 욕심을 줄이고 절제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겅 혼뻔에 확 다 잡아불민 어떵허느냐. 갸네도 새끼도 낳곡 헤엄도 치곡. 겅해야 바당도 살곡. 서로 고치 살아사주(그렇게 한 번에 확 다 잡아버리면 어떡하니. 걔들도 새끼도 낳고 헤엄도 치고. 그래야 바다도 살고. 서로 함께 살아야지).”

초보 해녀의 빈 망사리에 자기가 잡은 ‘물건’을 하나씩 넣어주는 고참 해녀들, 나이든 해녀들을 위해 만든 노후보장책인 ‘할망바당’(수심은 얕지만 해산물이 풍성한 바다를 지정해 나이든 해녀들만 작업하도록 하는 제도), ‘불턱(해녀들이 일하는 바닷가 근처에 설치된 불을 쬐는 곳)에서 나눈 이야기는 절대로 밖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비밀 엄수 원칙 등 해녀 세계에는 오래된 지혜가 가득하다.

바다의 파도와 인생의 파도를 함께 타넘으며 늙어온 해녀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뜻밖에도 살아갈 용기가 차오르는 걸 느끼게 된다.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게 된다)” 같은, 단순하지만 단단한 위로와 만나게 된다. 또 모두가 자기 밥통 지키기에 급급한 이 매몰차고 야비한 세상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우애의 공동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59세에도 ‘언니’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서명숙은 해녀들을 오래 바라보고 넓게 취재해서 쉽게 써냈다. 책을 읽고 나면 해녀들을 만나고 싶어진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