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명숙 <4> 27일간 농성 계기 외국인 근로자도 산재보험 혜택

입력 2015-10-28 18:38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오른쪽)과 남편 이호택 피난처 대표. 조 교감은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이 믿는 바를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어 결혼을 결심했다”고 고백했다.

나를 포함해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에서 근무하던 네 명의 사회운동가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밝히고 싶었다. 당시 외국인 노동자들이 심각하게 겪고 있던 문제는 일하다 다쳤을 때 보상에 관한 것이었다. 대부분 불법체류자로 간주돼 산업재해(산재) 보험급여(보상금)를 받기는커녕 업주들의 신고로 오히려 벌금을 내고 추방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우리는 제도를 바꿀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일하다 손과 발이 절단된 13명의 외국인 노동자들과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신의 손발을 앗아간 이 나라에 대한 원망보다 짧은 순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뒤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사회적 무관심에 더 실망했다.

나는 지쳐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격렬했던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냈다. 27일간 이어진 농성이 불쏘시개가 되어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우리 사회의 공감대를 만들어냈다. 결국 불법체류 중인 외국인 노동자라도 일하다 산재를 당하면 노동자로서 보험급여를 지급하도록 법이 개정됐다.

이후 좋은 소식들이 들려왔다. 당시 5인 이하 사업장에서는 산재보험 가입이 의무사항이 아니었기에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근로자들도 산재보험급여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에게 보험급여를 지급하도록 법이 개정된 뒤 1인 이상 사업장에서도 산재 가입이 가능하도록 법을 고쳐 사각지대에 있던 한국인 근로자들도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약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면 그 위 계층의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풀린다는 것을 배웠다.

풍족하지 않은 상담소 여건상 법률 전문가를 영입하는 것은 어려웠다. 자원봉사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난민지원 단체 피난처의 이호택 대표도 자원봉사자였다. 못생긴 외모에 나이도 열한 살이나 많고 월급이 없던 사람이라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일하다 지쳐서 쉬고 있을 때마다 상담소 한 구석에서 묵묵히 법률 자문을 해주는 그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그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커져가던 어느 날, 조심스럽게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난했지만 공부를 잘했던 이 대표는 서울대 법대 졸업 후 대학원 시절에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부터 이상하게도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아 사법시험에서 1차만 합격하고 논술형으로 시험을 보는 2차는 계속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또 자신은 신장 하나를 선교사에게 기증했다고 고백했다. 깜짝 놀라 이유를 물으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제겐 단순히 나누는 일이지만 그분에겐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에 기증을 했습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가 다르게 보였다.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이 믿는 바를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평생 존경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시작한 지 4년 만인 1997년 4월 동역자인 이 대표와 결혼했다. 나는 결혼 전 필리핀에서 6개월간 체류하며 수십 명의 산재 대상자들을 찾아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하다 다치고 귀국한 중국인 중에는 산재 대상자가 너무 많아 일손이 크게 부족한 상태였다. 결국 이 대표와 나는 동료들이 일하고 있는 중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아예 서울 관악구 난곡동 신혼집을 중국 선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하다 중국동포들의 소개로 탈북자들을 처음 만나게 됐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