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만의 죽음으로 나는 가난한 나라의 외국인 노동자에게 도움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과 마주한 나는 교사의 꿈을 잠시 내려놓고 그들을 돕는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고 관련 지식도 짧았지만 뜻을 같이하는 법률가들의 도움으로 1994년 작은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를 열었다. 임금체불 산재문제 성폭행과 더불어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한국인 노동자와 다른 문제들이 있었다. 일을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사장들이 월급을 주지 않고 내쫓았고, 일 잘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겐 다른 공장으로 갈까봐 여권을 압류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어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은 내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럼 나는 문제가 일어난 현장으로 바로 달려갔다. 법률적인 근거를 토대로 상황을 설명하면 대부분의 사장들은 못내 아쉬워하거나 약간 화를 내고는 문제를 해결해줬다. 그러나 몇몇은 24세 된 내게 “술 한잔 같이 하면 여권을 주겠다”거나 “왜 한국 사람이 한국인 사장들을 돕지 않고 외국인들을 돕느냐” “왜 멀쩡하게 생겨서 외국인들하고 붙어 다니냐”며 모욕을 주곤 했다. 어떤 사장은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서 있는 내게 손찌검을 하려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내가 그 일을 그만둘까봐 눈치를 살피며 초조해했다.
나는 외국인 친구들 앞에서 한국인 사장들에게 강하게 응수했다. “사장님, 저희 아버지도 사우디에서 일했던 외국인 노동자였거든요. 제 아버지에게 사우디 사람들이 이렇게 대했다고 하면 절대로 그 나라 상품은 하나도 사지 않았을 겁니다. 즉시 본청 업체에 해결을 요구할 겁니다.”
대부분 하청업체인 그들에겐 ‘본청업체와의 계약해지’가 큰 위협으로 여겨졌고 두 눈을 부릅뜬 나의 강경대응에 사장들은 꼬리를 내리곤 했다.
한번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두 개가 잘린 방글라데시 형제가 물었다. “누나는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하세요? 내가 보기에 월급도 없고 누나도 부자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우리 문제를 풀어 주면서 전도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당시 외국인 노동자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공장에서 일하다 일요일에만 상담소를 찾아왔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외국인 노동자로 인해 주일성수를 거의 하지 못했다. 솔직히 성경 지식이 부족한 나는 전도한다면서 그들과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종교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이슬람 외국인 노동자가 의문을 가진 것이다.
나는 방글라데시 형제에게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좋아서 너희들의 친구가 돼서 돕고 싶은 거야. 하나님께서 너희들도 사랑하고 또 너희들이 힘들다는 걸 아시고 나로 하여금 돕기를 원하셨으니까”라고 답했다. 이에 대한 형제의 대답은 더 놀라웠다.
“누나가 내 손가락 잘린 사고를 해결하기 위해 도와줬다고 내 목숨보다 귀한 종교를 바꿀 수는 없어요. 하지만 누나가 나랑 종교가 다른데도 아무 조건 없이 나를 도와줬으니까 내 나라에 가서는 핍박받는 기독교인이 있으면 그들을 도와줄게요. 그들이 감옥에 간다면 내가 빼줄게요.”
주위에서 나와 형제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도 서로 자기도 그렇게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이미 이들 마음속에 전도의 싹이 트고 있음을 느꼈다. 전도나 선교는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역경의 열매] 조명숙 <3> ‘교사의 꿈’ 미룬 채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 열어
입력 2015-10-27 1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