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북한을 둘러싼 동북아 정세를 묻는 질문에 존 에버라드(59) 전 북한 주재 영국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2015 윤보선 기념 심포지엄’ 참석차 방한한 그를 지난 23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만났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10월 10일’에는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행사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 서열 5위인 류윈산(劉雲山) 정치국 상무위원이 평양에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와 나란히 열병식 사열대에 섰다.
에버라드 전 대사는 이 행사를 통해 ①중국이 북한에 엄청난 원조를 재개할 것이고 ②김 제1비서가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두 가지가 확인됐다고 분석했다. “이제 중국은 북한에 대한 비판을 망설이고 북한을 보호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이 남북통일을 원하는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평양과 관계가 좋아졌다는 것은 통일로 가는 길이 좀 더 어려워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했다.
그는 김정일 집권 때인 2006∼2008년 평양에서 지냈다. 30년간 4개 대륙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지만 가장 폐쇄적인 북한에 주재한 경험은 그를 대표하는 이력이 됐다. 지난해 ‘영국 외교관, 평양에서 보낸 900일’이란 책을 썼고 지금도 북한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김정은 정권의 잇단 숙청과 고위직 교체에 대해서도 좀 다른 의견을 내놨다. 체제가 불안정한 게 아니라 김정은이 그냥 ‘부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지도자(demanding boss)’여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뭔가 김정일 시대엔 없었던 ‘경제적 개혁’을 진행 중인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김 제1비서는 어떤 인물이라고 보나.
“직접 만나보진 못했지만 북한 친구들을 통해 ‘인간 김정은’에 대해 전해들었다. 농담을 즐기고, 웃음이 많고, 사람들과 얘기하는 걸 좋아하고, 가정적이어서 아내에게 매우 잘한다고 들었다. 아버지와는 꽤 다른 유형인 셈이다. 김정일은 친구도 많지 않고 늘 거리를 두는,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었다.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다. 김정일은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 김정은은 늘 사람들 곁에서 웃고 있다. 김정은이 집권 이후 여섯 번이나 인민무력부장을 교체한 것을 두고 정권이 불안정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그냥 김정은이 부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통치자라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김정일과 김정은 체제의 북한 내부 분위기는 어떻게 다른가.
“지인들로부터 평양이 많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커피숍 레스토랑이 무척 많이 생겼고 다양한 옷을 살 수 있게 되는 등 외적 변화가 뚜렷하다고 한다. 김정은이 아버지가 하지 못했던 경제 개혁을 시도 중인 것은 확실하다. 북한이 일일이 공개하지 않을 뿐이지 우리가 모르는 여러 개혁이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농업 개혁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한·중, 한·미 정상회담이 잇따라 열렸다. 류윈산 상무위원이 평양에 갔다. 어떤 변화가 있을까.
“10월 10일 행사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의 큰 흐름을 바꿨다. 류윈산은 중국 공산당 서열 5위다. 2011년 방북한 리커창 당시 상무위원은 서열 7위였다. 2단계나 높아졌다. 중국은 ‘우연히’ 이런 변화를 주지 않는다. 북한은 서구 공산당들, 베트남 공산당, 심지어 러시아도 제치고 중국만 공들여 불렀다. 특히 러시아가 빠진 것은 매우 중요한 신호다.
시진핑이 전달한 메시지에는 대북정책을 재정비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협력 약속과 정상급 교류 두 가지가 핵심이다. 중국이 북한에 원조를 하겠다는 것과 김정은의 방중이 임박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제 중국은 북한을 비판하기를 주저하며 보호할 것이다. 통일에 대한 중국의 태도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베이징과 평양의 관계가 개선됐다. 통일로 나아가는 길이 험난해질 수 있다. 변수였던 북한 경제도 새 국면을 맞았다. 중국의 원조가 기정사실화돼 북한 경제난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다. 지켜봐야 한다.”
-남북통일을 전망한다면.
“몇 년 전 외교부 차관급 인사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더니 그는 아주 간단하게 답했다. ‘통일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때에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올 겁니다.’ 맞다. 세계사에 기록할 만한 사건은 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벌어지고 있다.”
-북한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화는.
“20대 여성인 북한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외국인을 만나는 게 조심스러운 일이어서 점점 걱정이 됐다. 뒤늦게 나타난 그에게 걱정했다고 하니 ‘정치 모임에서 위대한 김정일 수령님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느라 조금 늦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수령님을 위해 노래하다 늦었다면 내게도 한 곡 들려 달라 했더니 망설임도 없이 일어나서 정자세로 김정일 찬양가를 불렀다. 북한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일화였다. 노래는 잘 부르더라.”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
[단독 인터뷰] 존 에버라드 前 북한 주재 영국대사 “동북아 정세, 10월 10일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입력 2015-10-26 2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