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모님의 어려운 삶을 그대로 닮아갈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가르쳐 가난의 대를 끊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눈빛으로 흘러내리는 좋은 기독교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끝날 무렵 기독교 교사의 꿈이 생기고서야 철이 든 나는 삼수 끝에 단국대 한문교육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성경 구절을 읽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됐다.
나는 늘 도움을 받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내게 도움울 주었던 분들은 늘 겸손했다. 덕분에 강했던 내 자존심이 상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나도 겸손한 마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나누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났을까. 집에 잘못 걸린 전화가 왔다. 누군가를 찾는 절박한 전화였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어눌한 발음에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파키스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라고 답했다. 나는 그가 잘 알아듣도록 영어로 전화를 잘못 걸었다고 “You got the wrong number”라고 말했다. 그는 당황하며 “미안 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왔다. “당신이 영어를 할 줄 알면 나를 좀 도와 주세요”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려서부터 빈민촌의 어려운 사람들 틈에서 살았던 나는 그들의 표정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 분간할 수 있었다.
상황을 들어보니 친구인 파키스탄 노동자가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가 폭발해 사고를 당했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해 아는 사람에게 급히 전화를 걸다가 번호를 잘못 누른 것이었다. 나는 환자가 누워있다는 고려대 구로병원으로 향했다. 중환자실에서 나보다 두 살 어린 파키스탄 환자 노만과 그를 간호하기 위해 빵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파키스탄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을 위해 죽을 순 없지만 친구로서 도울 수는 있을 것 같아 간호를 시작했다. 당시 나는 수업을 받다 중환자실 면회시간인 저녁 6시가 되면 서울의 남쪽 끝자락인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환자 간호를 했다. 이어 역삼동으로 가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한 뒤 병원으로 돌아가서 병문안을 온 파키스탄 친구들의 저녁밥을 사주고서야 서울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면 밤 12시가 훌쩍 넘었다. 그렇게 15일 정도 간호했는데 어느 날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로만 누워있던 노만이 깨어났다. 그는 내게 “누나 고마워요. 내가 다 알아요”라고 말했다. 그동안의 피로가 싹 가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노만은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 그는 국내 산업현장에서 일하다 산업재해로 죽은 첫 번째 외국인 노동자였다.
노만이 죽은 뒤에도 그와의 연결고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친구를 애도하기 위해 멀리서 달려온 파키스탄 노동자들에게 장례식장에서 라면을 대접하고 청소하는 일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당시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가 있었는데 사고 처리, 장례 절차와 관련해 건건이 부딪히면서 파키스탄 친구들이 도움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너무 안타까워 “왜 전문가들의 제안을 거절하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상담소 사람들은 한국인이라 우리 파키스탄 사람들의 입장을 모를 것이고, 종교도 가톨릭이라 이슬람인 우리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러니 미스 조, 네가 보호자로서 도와줘”라고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했다. 나는 망자의 주검까지 확인해야 하는 보호자로 나를 지명하는 파키스탄 친구들에게 화도 나고 무서워서 “야! 나도 한국사람이고, 게다가 기독교인이란 말이야”라고 울먹였다. 그들은 울먹이며 내 눈을 응시하곤 “미스 조, 너는 친구잖아”라고 말했다. 나의 외국인 노동자 사역은 그렇게 시작됐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역경의 열매] 조명숙 <2> 잘못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외국인 노동자와 인연
입력 2015-10-26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