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에서 고철과 빈 병, 폐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는 황모(77)씨는 요즘 빈손으로 귀가하는 일이 잦다. 25일에도 동트기 전부터 2시간여 주택가를 돌았지만 손수레에 실은 빈 병은 소주 2병과 맥주 5병이 전부다.
황씨는 “병값 오른다더니 사람들이 병을 내놓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동네에서 고물상을 하는 이모(57)씨도 “수거되는 빈 병이 거의 반으로 줄었다”며 “원래 손만 많이 가고 돈은 안 되는 게 빈 병인데 이제 빈 병 수거는 접어야겠다”고 말했다.
경기도 이천에서 빈 병 수거업체를 운영하는 신모(58)씨는 매출이 바닥을 쳤다. 신씨는 “매일 빈 소주병 1만2000개를 주류회사에 실어 날랐는데 지난달부터는 1주일에 두 번 실어 나를 물량도 없다”고 말했다.
빈 병이 사라졌다. 고물 수집하는 노인의 손수레와 고물상, 빈 병 수거 전문 업체에 빈 병이 없다. 주류업체도 빈 병이 모자라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
환경부가 빈 병 보증금을 인상하겠다고 발표한 뒤 한 달 사이 벌어진 일이다. 인상안에 따르면 내년 1월 21일부터 소비자가 빈 병을 소매점 등에 돌려줄 때 받는 보증금이 오르게 된다. 현재 소주병 40원, 맥주병 50원에서 각각 100원, 130원으로 인상된다.
환경부는 빈 병 보증금을 현실화해 빈 병 회수율과 재활용률을 높이려 한다. 빈 병 보증금은 1994년 이후 21년째 동결돼 왔다. 우리나라 빈 병 회수율은 95% 수준이다. 98%를 넘는 독일 캐나다 핀란드 등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재활용률은 차이가 더 크다. 우리나라는 85%에 불과하지만 핀란드는 98.5%나 된다. 이렇다 보니 재사용 횟수도 격차가 크다. 독일은 한 번 생산한 병을 40번 넘게 재사용하는데 우리나라는 8번에 그친다.
이렇게 재활용률이 떨어지는 건 소비자가 소매점에 직접 빈 병을 반납하지 않고 고물상을 거치면서 훼손되는 빈 병이 많기 때문이다. 분리 배출할 때 깨지거나 흠집이 난 병은 재활용할 수 없다.
재활용을 유도하기 위한 정부 정책이 실제로는 빈 병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보증금이 인상되고 난 뒤 시장에 내놓을 요량으로 빈 병 수거업체를 중심으로 일종의 ‘사재기’가 성행하고 있다. 지난달 빈 병 회수율은 81%로 지난해 같은 달(96%)보다 크게 떨어졌다. 고물 줍는 노인부터 주류업체까지 ‘빈 병 생태계’가 교란되고 있는 것이다.
병이 회수되지 않자 주류업체도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 한국주류산업협회는 지난 22일 기자회견을 열어 “빈 병 사재기로 사회 혼란만 가속화될 뿐 정책의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빈 병 보증금 인상안의 철회를 요구했다.
환경부는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섰다. 내년 1월 21일 이후 출시되는 병에는 라벨을 부착해 기존 빈 병과 구별되도록 했다. 지금 빈 병을 모아둬 봤자 인상된 보증금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빈 병을 사재기하거나 라벨을 고의로 훼손하면 관련 법규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
보증금 인상 발표 한 달 ‘빈 병이 사라졌다’… 사재기 극성 회수율 되레 ‘뚝’
입력 2015-10-25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