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노사정 합의사항을 정부가 먼저 어기면 어떡하나

입력 2015-10-25 18:13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에서 ‘9·15 노사정 합의문’의 합의사항과 달리 모성보호지원금에 대한 일반회계(정부예산) 지원 비중을 낮췄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모성보호·육아지원사업에 총 9297억원이 배정됐지만, 이 중 정부 예산은 700억원으로 전체 지원금의 7.5%에 불과하다. 액수는 올해와 같지만 부담 비중은 올해의 8.7%에서 줄었다. 나머지는 모두 고용보험기금에서 부담한다. 노사정 합의문에는 사회안전망 확충 부문에 ‘고용보험의 모성보호사업에 대한 일반회계 지원을 확대한다’고 돼 있다. 정부는 합의사항을 지키려는 시늉도 내지 않았다.

고용보험기금은 정부의 쌈짓돈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연간 1조원에 육박하는 모성보호·육아지원비 대부분을 노와 사가 부담하는 고용보험기금에 의존하고 있다. 고용보험기금은 사회보험 기능을 하지만 노와 사가 돈을 분담하고 가입률도 낮은 편이어서 사적 보험의 성격이 4대 사회보험 가운데 가장 강하다. 수혜자 대부분이 여성이고, 수령인 중 보험 비가입자도 상당수인 모성보호·육아지원비를 계속 고용보험에서 부담케 하는 것은 고용보험 취지에 반한다. 게다가 모성보호사업비는 고용보험기금의 안정성을 훼손해 기금고갈 우려를 가중시키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앞서 실업급여 지급 수준과 지급 기간을 늘리는 쪽으로 고용보험법 개정안을 마련하면서도 노사정 합의를 위반했다는 한국노총의 항의를 받았다. 한국노총은 “구직급여 수급 요건을 이직 전 18개월 동안 180일 이상에서 이직 전 24개월 동안 270일 이상으로 까다롭게 만드는 것은 실업급여 보장성 강화와 관계없는 합의 위반”이라고 반발했다.

노사정 합의문과 합의 구조를 흔드는 데는 정부만이 아니라 여당인 새누리당도 앞장섰다. 새누리당은 9·15 합의 이후 제출한 노동시장 개혁 관련 5개 법안에 미합의사항인 기간제근로자 기간 연장과 파견근로 확대를 포함시켜 한국노총의 반발을 샀다. 전문가 의견수렴 절차를 거친다는 합의를 위반했기 때문이다. 지난 7일 노사정위가 개최한 ‘9·15 사회적 대타협의 평가와 과제’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여당의 일방적인 입법화 전략이 노동시장 개혁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노사정위 안에서 2기 노동시장구조개선특위가 지난 14일 출범했지만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선거구 획정의 혼란 속에 노동시장 개혁이 추진 동력을 잃고 표류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개혁에 힘이 실리려면 정치권과 정부가 합의 내용을 존중하고, 미합의사항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 수렴을 거쳐 치열한 논의와 협상을 벌여야 하지만 오히려 합의의 발판을 무너뜨리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합의 당사자의 한 축인 노동계를 지금처럼 무시하고 나아가려 하면 반드시 역풍에 부닥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