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시절 선교사와 교회사 연구는 새로운 시사점을 주는 자료로 풍부하다. 헤론은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잡지 ‘The Church at Home and Abroad’(1888년 9월호)에 ‘Korea’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그가 남긴 유일한 잡지 기사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정부 제도는 가부장적으로 왕은 백성의 큰 아비와 같다. 한국 사회는 계급사회로 양반 중에 관리와 부자는 첩을 얻고, 빌붙어 사는 몰락 양반이나 친인척, 많은 하인들을 먹여 살린다. 가난한 양반의 아내들은 허드렛일을 한다. 한때 과거로 관리를 선발했으나 지금은 연줄로 뽑는다. 보수적 관리는 소수다. 중국인이 보수적이고 일본인이 과격하다면, 한국인은 논리적이고 독립적이라 좋은 것은 쓸 만할 때까지 사용한 후 버리고 새 것도 좋다면 수용한다. 벌써 한국에는 근대학교와 병원, 기선, 전기가 있다. 한국인은 배우기를 좋아한다.”
분석에 따른 선교 정책
헤론의 주 관심은 선교의 자유였다. 선교사들이 지방까지 여권 없이 자유롭게 여행하고 전도하며, 선교회 부동산을 매입하고 거주할 수 있고 한국인들이 교회를 세우고 예배드리는 자유를 고대했다. 이를 위해 직접 전도를 원했지만, 먼저 교육과 의료, 문서사업으로 문을 열고 기초를 닦으면 선교의 자유가 주어질 것으로 믿었다. 이 점에서 헤론은 개척 선교사로서 안주하는 보수파나 과격한 행동파가 아니라, 논리적인 단계론자로서 때에 맞는 사역과 정책을 만들어가는 시중(時中)론자였다. 누구보다 전도 열정이 많았지만 섣부른 전도로 선교의 문이 막히는 것을 우려했다.
조선의 왕정과 관료제, 유교 가족제도와 계급제도의 핵심에 가부장제도가 있다면 적절한 선교 정책은 무엇이어야 할까. 국가(國家)도 집안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관직에 나가 가문의 명예와 부를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여기에 교육 혼인 직업 노동 유산 제사에 대한 제도가 하위구조를 형성하고 있다(아직도 한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일류대 합격자, 고시 합격자, 출신학교별 정부 고위직 숫자를 자랑한다).
따라서 헤론은 언더우드의 직접 전도를 통한 신속한 복음화론을 비판하고, 합법적이고 신중한 접근법을 지지했다. 그의 선교 정책은 첫째 국왕과 고위관리(양반층)의 호의를 끌어내는 방법이다. 왕실과 양반층의 관심은 가문을 지키고 근대 문명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어 독립된 근대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헤론은 기독교 문명을 전파해 한국을 근대화하는 사업을 지지했다. 곧 배우기를 좋아하는 한국인에게 각종 학교를 통해 근대 교육을 제공하고, 의료 사업으로 국민 건강을 유지하고 위생 사업으로 전염병을 막아 선교의 기초를 놓아야 한다고 보았다. 헤론은 선교사나 외국인이 미국의 신문 잡지에 한국 정부나 왕실, 양반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는 것을 엄중 비판했다. 한국 관련 기사는 공사관들을 통해 한국 정부에 들어가면서 역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둘째, 독립적 한국인 본성에 맞는 네비어스정책을 지지했다. ‘헤론 의사의 선교편지’(김인수, 2007)에 실린 그의 마지막 편지(1889년 12월 18일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부자 양반에게 빌붙어 사는 의존자들과 노동을 천시하는 양반들의 직업관은 개혁되어야 한다. 돈이나 직업을 얻기 위해서 선교사에게 오는 자들이 많다. 네비어스의 책, ‘선교사역의 방법들’을 읽고 공부 중이다. 천주교와 감리교는 아낌없이 돈을 쓰며 성당이나 학교를 짓고, 학생들을 지원하며 개종자를 만든다.”
장로교는 처음부터 자립하는 독립된 본토인의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게 헤론의 생각이었다. 그 결과 장로교회는 1890년대까지 감리교회의 인적 물적 공세에 밀려 늦게 성장했으나, 네비어스의 ‘자급 자전 자치’ 정책으로 1900년대 이후 급성장했다.
셋째, 네비어스정책을 수용하듯이 헤론과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등은 중국과 일본의 고참 선교사들의 조언을 수용했다. 곧 장로회 측은 요코하마의 햅번 의사, 산동 지푸의 네비어스 목사, 베이징의 윌리엄 마틴 목사, 만주 심양의 로스 목사 등의 정책과 소책자를 수용했다. 감리회 측은 푸초우(福州)에서 요코하마로 옮긴 맥클레이 목사와 서울로 옮긴 올링거 목사가 당시 20대 선교사들의 멘토가 되었다.
헤론은 병원 사역과 번역 사역을 하고 있었기에 헵번이 모델이 되었다. 헤론은 그의 기독교 문명론 입장을 지지했고, 오래 살았더라면 한국의 헵번이 될 수 있었다. 결국 1910년대까지 장로교회는 단기적 교회 설립론(네비어스정책)이 지방으로 확대될 때 장기적인 기독교 문명론이 서울을 중심으로 공존하면서 성장했던 것이다.
전적인 의료 사역
헤론의 의료 사역은 위의 선교 정책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후반기 의료 사역은 제중원 사역, 외부 왕진, 자택 진료로 이루어졌다. 뒤의 두 일이 더 많았다. 왕진은 고종과 왕세자, 왕비의 왕실 진료, 양반 고위층과 외국 공사관 외교관과 서울의 외국인이 대상이었다. 고위층 진료로 개신교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이끌어 냈다. 알렌이 사임한 후 헤론의 사역은 두 사람이 일할 때보다 배로 늘어나, 하루에 7시간 이상 진료하며 과로했다. 1889년 5월 말 그는 “20개월 이상을 온 힘을 다 쏟아 제중원 의료 사업이 본 궤도에 올랐다”고 썼다.
헤론은 두 딸을 낳고 병상에 있는 아내를 돌보며, 다양한 진료로 쉴 틈이 없었다. 그러기에 파워 의사와 같이 술을 마시고 여자들과 어울리는 자는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늘 “나는 내 생명을 선교에 바쳤습니다” “한국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할 소망을 품지 않았다면 바로 일을 그만 둘 것입니다”라고 고백했다. 1889년 말 그는 “즐기는 일은 전혀 없이 전적으로 진료만 하고 있다”고 선교부에 보고했다. 과로는 그의 생명을 단축하게 만들었다. 개척 선교사로서 헤론의 선교 정책(기독교문명론과 네비어스정책의 조화)은 이후 에비슨으로 연결되어 언더우드도 수용했다.
옥성득 교수(美 UCLA)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9) 헤론의 후반기 사역
입력 2015-10-26 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