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나 오페라는 꼭 스토리가 있어야 할까?
로버트 윌슨이 연출한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23∼25일 광주 아시아예술극장이 20세기 공연예술사에 파장을 일으킨 거장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 ‘아워 마스터(Our Master)’의 첫 번째 작품으로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은 윌슨이 작곡가 필립 글래스와 함께 1976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처음 선보인 것이다.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작품 제목에도 나오는 아인슈타인과 관련한 몇 개의 힌트가 극 중에 제시되긴 하지만 특별한 스토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중심이 되는 사건이나 플롯은 아예 없고 논리도 없는 반복적인 패턴의 이미지로 구성돼 있다. ‘수학적 혁명’을 상징하는 아인슈타인과 관련된 세 가지 주제의 이미지인 기차와 빌딩, 법정과 침대, 야외와 우주가 5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변주된다.
음악도 매우 반복적이며 배우의 움직임이나 대사도 단순하기 짝이 없다. 글래스가 만든 코러스(합창)의 가사를 보면 1부터 8까지의 숫자와 도레미파솔의 음계로만 이뤄졌다. 언어나 선율보다 시각적인 이미지들이 압도적인 이 작품은 음악, 무용, 미술이 버무려진 콜라주를 연상시킨다. 관객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열린 텍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불편하고 불친절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구조를 보면 매우 전통적이고 단순하다. 기존의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주제와 음악이 변주되고 반복되기 때문이다. 4막과 5개의 막간극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기승전결 구조로 된 뚜렷한 줄거리가 없지만 강렬한 이미지만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물론 이야기 중심의 연극이나 오페라 등 서사에 익숙한 관객에게 이 작품은 확실히 어렵지만 무대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깊은 잔향처럼 이미지들이 가슴속에 남게 된다. 추상적인 미술과 무용, 음악처럼 연극 역시 추상적이어도 충분히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뉴욕타임스가 1999년 20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꼽을 만큼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연극의 논리와 이성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 표현의 영역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미술의 마르셸 뒤샹이나 음악의 존 케이지가 각각의 영역에서 표현을 확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뒤샹은 1917년 어디서든 볼 수 있었던 흔한 남성용 소변기를 전시장 안에 가져다 놓은 뒤 ‘샘’이라는 타이틀로 전시했다. 그는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재현하는’ 미술가의 영역을 ‘제시하고 발언하는’ 존재로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케이지는 1952년 연주 시간 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는 음악으로 유명한 ‘4분33초’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악기를 연주한다는 음악의 정의에 도전하며 후대 예술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뒤샹의 ‘샘’이나 케이지의 ‘4분33초’는 발표 당시 아방가르드였지만 지금은 예술사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해변의 아인슈타인’ 역시 마찬가지다. 세대가 바뀌어도 후대 예술가와 관객에게 새롭게 생각할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고전의 자격을 갖췄다. 광주=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공연 리뷰-로버트 윌슨 ‘해변의 아인슈타인’] 스토리 없는 오페라… 어렵지만 깊은 잔향
입력 2015-10-25 20:26 수정 2015-10-25 2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