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아들의 “엄마!”라는 외마디에도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자꾸 떨어지는 눈물만 보였다.
“고생하셨지. 아들 살아 있어. 울지 마세요.” 아들이 휠체어를 탄 어머니의 볼을 부비며 안경 뒤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상봉장에 들어서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한걸음에 달려간 아들이었다. 눈물을 닦는 아들의 검게 그을린 얼굴, 거친 손마디엔 고단한 삶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43년 동안 서로 생사조차 모른 채 살아 있기만을 학수고대하던 모자(母子)의 만남은 울음바다가 됐다. 1972년 12월 28일 서해에서 홍어잡이를 하다 북한에 납치됐던 오대양62호 선원 정건목(64)씨가 제20차 이산가족 상봉 2회차 행사 첫날인 24일 금강산호텔에서 어머니 이복순(88)씨와 대면했다.
어머니 옆엔 헤어질 때 11살 어린 소녀였던 여동생 정향(54)씨가 “오빠야, 오빠야”하며 통곡했다. 두 살 터울의 누나 정매(66)씨도 오열했다. 스물한 살 꽃다운 청년이었던 정씨의 얼굴엔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설움이 복받쳐 어머니도 누나도 누이동생도 그동안 가슴속에 꼭꼭 묻어뒀던 얘기조차 꺼내기 어려웠다.
겨우 호흡을 추스른 정씨는 어머니에게 “며느리야, 며느리” 하며 북측의 아내 박미옥(58)씨를 소개했다. 이씨는 며느리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는 동안 정씨는 여형제들을 안고 또 한참을 울었다. 정향씨가 말했다. “오빠,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정씨가 대답했다. “내가 이러려고 살아 있었어….”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며칠이면 헤어질 아들의 얼굴을 심장 속 도화지에 그대로 옮겨 그리려는 듯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네가 나이를 먹으니 큰형을 닮았다”고 했다. 아들은 “좋은 세상에 살았어. 근심 걱정 없어”라고 했다.
정씨가 탔던 오대양62호는 오대양61호와 함께 납북됐다. 홍어잡이를 하던 쌍끌이 어선 두 척에 탄 25명의 선원들은 그 길로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고, 생사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 선원 박두남씨가 2005년 북한 적십자사의 통보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2013년 9월 같은 선원 전욱표씨가 북한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2월 진행됐던 제19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역시 선원 박양수씨가 남측의 동생 양곤씨를 만났다. 정씨의 생사는 이달 초 우리 정부가 납북 어부와 국군포로 50명의 생사 확인을 북측에 요청하면서 처음 확인됐다.
정씨 아내 박씨가 난생 처음 만난 시어머니에게 “(남편이) 고생하는 것 하나 없습네다. 아들 걱정 하나도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서먹한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박씨는 어머니 이씨와 남편 정씨 사이에 앉았다. 어머니 옆에 앉으려던 정씨를 밀치며 다른 자리에 앉게 하기도 했다. 혈육이 거의 반세기 만에 만났는데 남과 북의 가족 사이엔 장벽이 쳐져 있었다.
조성은 기자, 금강산=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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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0-25 2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