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살을 부대끼며 사는 집에 피부가 있다면 무얼까. 꽃무늬, 방사형무늬, 줄무늬 등 시대에 따라 유행이 바뀌고 집 주인이 달라지면 그냥 그 위에 겹쳐 덧바르는 벽지가 아닐까. 남편의 담배연기, 가계부 쓰는 아내의 한숨, 둥근 밥상에 둘러앉아 온 가족이 함께 먹던 된장찌개 냄새까지 고스란히 밴 벽지에 눈길을 둔 작가가 있다. 서울대 조소과 출신으로 설치작업을 해온 연기백(41) 작가다.
2013년부터 서울 가리봉동, 교남동 등 철거지역의 낡은 집을 찾아 뜯어낸 벽지를 갖고 ‘도배 프로젝트’라는 설치작업을 해온 연기백의 작품 세계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서울 강남구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는 ‘연기백: 곁집’전이다. 송은아트스페이스는 송은문화재단이 2010년 개관한 복합문화공간이다. 2011년부터 한국작가를 지원해 전시를 열어주고 있다. 그는 4번째 대상으로 선정됐다.
전시장의 한 방에는 한 겹 한 겹 뜯어낸 벽지들이 염색천을 널어놓은 것처럼 걸려 있다. 자세히 보면 낡아서 찢어진 부분들이 이어 붙어졌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덧바른 도배가 많은 집에서는 열 겹이 넘기도 했다. 가장 아래에 있는 부분에서는 1960년대 신문이 나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겹겹이 붙은 도배지는 커다란 수조에 오래 동안 두면 한 겹 한 겹 떨어진다. 그는 “가난이라는 도식적 해석을 배제하면 벽지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방에는 철거지역에서 뜯어낸 함석지붕이 있다. 그 위로 양철 빗물받이가 엇갈리게 설치돼 있고 틈 사이로 새는 ‘빗물’이 함석지붕 위로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빗물이 퍼져 전시장 가득 느껴지는 축축함이 후각과 촉각을 건드린다. 도배지 푼물이 흘러와 빗물이 됐다.
벽지 뜯기를 하던 그에게 장삼이사가 휘갈긴 낙서도 눈에 띄었다. ‘홀로 춤추는 사람을 홀로 춤추게 두지 말라.’ 마포대교 생명의 다리에서 만난 글이다. 여기저기서 채집한 낙서를 비닐에 본을 뜨고 폐기된 장판에 옮기고 모양대로 잘라냈다. 낙서는 텍스트화 돼 전시장 벽면에 그득하다. 도배업을 100년째 가업으로 하고 있는 대구의 도배사를 인터뷰한 영상도 있다.
‘곁집’은 전시장 입구에 설치한 집 형태의 작품명이다. 그는 건물 잉여공간에 이런 집을 짓고 익명의 잠재적 관객과 만나는 프로젝트를 지속하고 있다. 도서관에 꽂힌 책의 갈피 등에 메모를 남겨 이 곁집으로 관객을 무작위로 초대하는 형식이다. 팔리지 않는 작업이지만 삶의 더께를 시각화하려는 예술적 고집이 꾸미지 않는 그의 얼굴 표정만큼 순수하다. 11월 28일까지(02-745-1149). 손영옥 선임기자
빛 바랜 도배지, 예술이 되다… 설치작가 ‘연기백: 곁집’展
입력 2015-10-25 2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