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일 만 이천 봉을 죽죽 내리 긋는 힘찬 붓질로 진경산수화를 개척했던 조선 숙종∼영조 때 선비 출신 화가 겸재 정선(1676∼1759). 그는 한여름 오이 밭의 패랭이와 개구리 등 일상 공간에서 만나는 동식물에도 눈을 돌리고 화폭에 담았다. ‘과전전계(오이 밭의 참개구리)’는 A4용지 크기지만 세필로 표현한 피부가 살아있는 듯 미끈해 개구리가 그림 밖으로 폴짝 뛰어나올 것 같다.
정조가 가장 사랑했던 화원 화가 김홍도(1745∼1806?). 그 역시 초충도를 남겼지만 개념은 좀 다르다. ‘황묘농접(노란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은 화창한 봄날, 검푸른 제비나비가 패랭이꽃을 보고 날아들고 있고, 주황빛 고양이가 고개를 돌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비를 쳐다보는 순간을 포착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상징 코드가 숨어 있다. 고양이는 칠십 노인, 나비는 팔십 노인, 패랭이꽃은 청춘, 바위는 변치 않음을 뜻한다. ‘영원한 젊음’에 대한 소망을 담은 이런 그림은 장수를 축원하는 당시 최고 선물이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간송문화전-화훼영모 자연을 품다’전이 지난 23일 개막했다. 간송미술관이 대중에게 더 많은 소장품 관람 기회를 주기 위해 2014년부터 이곳에서 해 오던 외부 전시 다섯 번째다.
화훼영모는 꽃과 풀, 곤충과 짐승 등 동식물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말한다. 조선시대 화가에게 동식물은 우주만물의 섭리가 함축된 존재로 도덕적 이상을 담은 자연의 일부였다. 그러면서도 무병장수나 입신출세의 세속적 욕망을 담기도 했다. 정선의 과전전계가 전자라면 김홍도의 황묘농접은 후자에 해당한다. 관념 속 산수가 아니라 발로 뛰어 눈으로 확인한 자연을 담았던 정선은 동식물을 그릴 때에도 있는 그대로를 사생했다. ‘서과투서(수박과 도둑쥐)’에서 수박을 사이좋게 갉아먹으며 포만감에 젖은 쥐들의 표정에는 해학도 있다. 간송미술관 탁현규 연구원은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거시의 세계라면 주변에서 사생한 화훼영모는 미시의 세계로 모두 사실정신이 충만하다”고 말했다.
이에 비하면 김홍도의 화훼영모는 순간 포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실감이 있지만 정교하게 연출된 화면 구성인 것이다.
전시는 이징 윤두서 강세황 변상벽 신윤복 신사임당 장승업 등 문인화가와 화원화가, 여성화가를 망라한다. 특히 고려말 공민왕에서 조선말기 이도영에 이르기까지 500년에 걸친 대표작 90여점이 출동해 시대정신의 변천과 기법의 차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예컨대 조선 중기 화가 김시의 경우를 보자. 그가 그린 소는 누렁소가 아니라 남중국 물소이다.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중국에서 온 화보를 보고 그린 것이다. 성리학 이념에 따라 꼼꼼한 필치보다는 간략한 묘사에 그쳤다. 그러나 조선 후기 정선이 대표하는 우리식 산수인 진경산수의 시대에 이르면 동물 그림에서도 화풍이 확 바뀌어 사생을 통한 핍진성이 강조된다.
화가들의 성별, 출신 기반도 화풍에서 풍긴다. 조선 중기 여성화가 신사임당의 ‘훤원석죽(원추리꽃과 패랭이꽃)’은 담박하고 안정된 구도에서 온화함이 퍼져 나온다. 강세황의 ‘향원익청(향기는 멀수록 맑다)’은 연꽃 그림이다. 연 밭에 연이 가득하겠지만 단 두 포기만을 그렸으니 선비다운 절제가 있다. 화원화가 변상벽의 ‘자웅장추(암수탉이 병아리를 거느리다)’의 어미 닭은 깃털의 질감까지 남김없이 묘사한 세밀한 필치가 놀랍다.
예쁘고 친숙한 꽃그림과 동물그림이어서 우리의 옛 그림에 한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전시다. 내년 3월 27일까지(070-7774-2525).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고려·조선 ‘꽃·동물’ 명화 한자리서 본다… 간송문화전- ‘화훼영모 자연을 품다’展
입력 2015-10-25 20:58 수정 2015-10-25 2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