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정보부 기밀해제 파일로 본 흥미로운 사실] 배신의 제임스 본드… 본드걸은 없었다

입력 2015-10-23 19:20 수정 2015-10-23 21:17
최근 기밀 해제된 영국 정보기관을 다룬 비밀 파일에 등장하는 정보요원과 저명인사들. 냉전 시대 영국과 소련 사이에서 이중간첩으로 활약한 이른바 '케임브리지 스파이' 4인방 앤서니 블런트와 도널드 매클린, 가이 버지스, 킴 필비, MI6의 전설적인 잠수요원 라이오넬 크랩, 저명인 동성애자로 거론된 로버트 부스비 의원과 갱단 두목 로니 크레이, 부스비의 동성애인 레슬리 홀트(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영국 텔레그래프

“정말 이걸 원해요? 어둠 속에 홀로, 쫓고 쫓기면서 외롭게 사는 거?” “그런 생각 따윈 안 해.”

스파이 영화의 고전이자 바이블인 ‘007 시리즈’의 최신작 ‘스펙터’가 개봉을 앞둔 가운데 주인공인 MI6(영국 외무부 산하 비밀정보국) 소속 비밀정보원 제임스 본드가 읊조리는 영화 속 대사처럼, 쫓고 쫓기며 어둠 속을 암약한 스파이들의 일화와 이들이 캐낸 정보들이 공개돼 눈길을 끌고 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23일(현지시간) ‘최신 MI5(영국 내무부 산하 보안국) 파일에서 알게 된 7가지 매력적인 사실들’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기밀 해제된 MI5와 MI6의 비밀 기록에 담긴 흥미로운 내용들을 소개했다.

보도에 따르면 냉전 시대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이중간첩으로 활동하다가 발각돼 대다수가 러시아로 망명한 이른바 ‘케임브리지 스파이’ 4인방은 독 안에 든 쥐처럼 각자를 조여 오는 정보기관의 수사망을 앞에 놓고도 짐짓 모른 척 서로가 서로를 체포하거나 옹호하려 애썼다.

도널드 매클린과 가이 버지스가 1951년 러시아로 도망칠 즈음 또 다른 두 명의 멤버인 킴 필비와 앤서니 블런트는 그들을 공격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필비는 심지어 이들이 케임브리지대학에 재학할 때 “서로 동지를 모집하자”고 제안했던 당사자이면서 이들과 소련 정보기관인 KGB와의 관계를 엮은 장본인이지만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뻔뻔하게 자신의 역할을 연기했다.

냉혹한 스파이도 부모에 대한 사랑은 어쩔 수 없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소련으로 탈출한 버지스는 영국에 남아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일련의 편지를 보내 “(어머니가 러시아로) 방문할 수 있게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을 알리기도 하고, 언론에 자신이 노출되면서 “영국으로 송환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고백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

007 시리즈 하면 흔히 떠올리는 본드걸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대신 동성애가 불법이던 당시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주요 요원들과 저명인사가 동성애자였다는 후일담이 많았다.

케임브리지 4인방 중 버지스와 매클린이 소련의 이중간첩인 것으로 밝혀진 뒤 미국은 이들을 각각 ‘주정뱅이’와 ‘양성애자’로 칭하면서 미국 정보요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이 같은 ‘방종’을 일소할 것을 영국 당국에 요청하기도 했다. 버지스는 과음과 마약, 무분별한 행동으로 유명했으나 정작 MI5와 외무부는 그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매클린은 기혼자였지만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고도 전했다.

1960년대 악명 높은 갱단 두목이었던 로니 크레이와 보수파 의원이었던 로버트 부스비의 친분에 대한 정보 당국의 사찰 내용도 흥미롭다. 이들이 출신 배경을 뛰어넘는 친교를 나누는 것을 감찰한 MI5의 보고서는 이들을 “변태 성행위의 동료”라고 묘사하면서 함께 동성애 파티에 참석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크레이와 부스비가 서로 함께 자는 파트너는 아니었다”며 부스비의 동성애인은 따로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전직 해군 중령 출신 MI6 요원으로 일명 ‘부스터’로 불렸지만 미스터리한 실종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라이오넬 크랩과 관련된 새로운 정보도 눈길을 끈다. 그가 영국 포츠머스 항구에 정박된 소련의 구축함에 접근해 정보를 캐려다 감시망에 걸려 작전 중 사망했다는 것이다. 작전 과정에서 그의 행적이 이례적일 정도로 너무 많이 노출되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담겼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