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화백 별세] 굴곡진 삶 담은 강렬한 화풍… 꽃의 여인, 잠들다

입력 2015-10-22 22:50
천경자 화백의 1982년 작 ‘황금의 비’. 몽환적이고 섬뜩한 느낌의 여인은 작가의 자화상으로 읽힌다. 고(故)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천 화백의 작품세계에 대해 “그의 예술은 어찌 보면 기도 같기도 하고, 신들린 사람처럼 간절하기도 해서 고독의 즐거움과 슬픔의 아름다움이 승화돼 있다”고 평했다. 국민일보DB
1952년 작 ‘생태’.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35마리의 뱀이 사투하듯 뒤얽혀 있다. 혀를 날름거리며 표독스럽게 치켜든 뱀 얼굴에는 운명에 도전하려는 섬뜩한 자의식이 느껴진다.

1952년 피란지 부산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뱀 그림 ‘생태’는 해방 이후 화단에서 ‘왜색풍’이라고 무시당하던 28세의 천경자가 독보적 위치를 굳힌 출세작이다. 가문의 몰락, 남편과의 사별, 불륜, 여동생의 급작스러운 죽음…. 해방과 6·25전쟁이라는 시대적 격동과 개인사적 고통을 딛고 운명에 저항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작가적 명망은 얻었으나 끝내 태어난 땅과의 불화를 해소하지 못한 채 ‘꽃과 여인의 화가’ ‘한과 고독의 작가’ ‘영원한 나르시시스트’라 불린 천경자 화백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그간 생사 여부로 논란을 빚었던 천 화백이 두 달여 전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확인됐다. 천 화백은 98년부터 미국에 체류해 왔다.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관장은 22일 “딸 이혜선씨가 지난 8월 중순 유골함을 들고 미술관을 방문했다. 작가의 기증 작품이 있는 상설전시실과 수장고를 돌아보며 마지막 시간을 가졌다”고 말했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병석에서 지내던 천 화백의 사망 시점은 8월 6일 새벽인 것으로 전해졌다. 시신은 화장해 뉴욕 성당에서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천경자(본명 천옥자)는 24년 전남 고흥의 군 서기였던 천성욱씨와 박운아씨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41년 의대에 진학하라는 부친의 권고를 물리치고 일본으로 유학해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45년 귀국 후 도쿄제국대학 유학생이던 이철식과 결혼해 첫딸 혜선을 낳았다. 그와 일찍 사별했지만 이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광주 지역신문기자 김남중과 사랑에 빠졌으나 그는 아내가 있는 남자였다. “징그러운 뱀이라도 무더기로 그리지 않고는 목숨을 이을 수 없었다”는 시절이었다. 모교 전남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54년 홍익대 교수가 돼 상경하며 생활의 안정을 얻는다. 국전 심사위원, 예술원 회원 등을 지내며 작가로서의 명망도 거머쥔다.

그는 일제강점기, 화가의 등용문인 조선미전을 통해 등단했다. 42년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 43년 외할머니를 그린 ‘노부’로 연거푸 입선했다. 하지만 해방과 함께 ‘왜색풍’이라며 배격의 대상이 됐다. 모두가 전통 수묵으로 돌아가는 시대에 강렬한 채색의 동양화가 설 자리는 좁았다. 뱀 그림 ‘생태’는 그런 비판을 일소하는 계기가 된다. 감수성 풍부한 문학적 재능은 그에게 또 다른 아우라를 입혔다.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등 10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다.

독자적인 화풍을 모색했던 그가 찾은 출구는 해외 스케치 여행이다. 40대 초반부터 70대 초반까지 뉴욕, 파리 등 구미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중남미 등을 다녔다. 이는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천경자식 풍물화’의 원천이 됐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을 모티브로 한 자화상 ‘미인도 시리즈’가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 그림에는 화사한 보랏빛 행복과 꿈을 머금은 꽃, 상상의 나비가 있지만 그 밑을 흐르는 것은 여인의 진한 한이었다. 그래서 여인의 눈동자는 무섭기조차 하다.

천 화백의 독특한 화풍은 일본화다. 서양화다, 반추상이다 등 다양하게 불려왔다. 2006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회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이렇게 자부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고 사실적인 예쁜 그림으로 인기에 영합하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은 벽에 걸기조차 섬뜩한 인물화이지만 미래지향적인 소재와 화풍을 찾아 세계를 방랑하는 구도자의 삶을 살아왔다.”

그렇게 치열하게 가꿔온 작품 93점을 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그의 영혼은 마지막으로 이들 작품을 둘러보는 것으로 이승과 하직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