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뉴 밀레니엄이 시작된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지난 20세기와 비교하면 모든 분야에서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 예로 스마트폰을 들 수 있다. 스마트폰은 21세기 인류사회의 변화 속도를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기기다. 그 작은 휴대폰 하나로 우리는 세상과 연결된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상대방이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통화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의 풍경을 찍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에게 몇 초 내에 전송할 수 있다.
이제는 개개인이 몇 초 단위로 업그레이드되는 각종 정보들을 접한다. 지식이 공유되는 시대다. 스마트폰은 필수품이 됐다. 스마트폰은 우리가 변화에 빨리 익숙해지게 만들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한다. 그러나 식상함을 빨리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그래서일까. 미국 영화배우 윌리엄 맥나마라는 “현대사회는 너무나 노쇠해 있고 모든 것이 진부하고 지루하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지루한 세상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기는 너무나 힘들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라. 현대사회가 얼마나 빨리 변화하고 있는가. 노쇠함이나 지루함이란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살았던 20세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결론을 말한다면 그렇지 않다.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빠른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으로 노쇠해가고 있고 지루함은 변화가 빠를수록 더 심각해져간다. 이 지루함의 정체가 무엇일까. 그것은 영혼의 공허함이다. 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나온 역발상이 ‘인문학 열풍’이자 ‘슬로 라이프’다. 심지어 음식도 정성 들여 만든 슬로 푸드, 집밥 열풍으로 탈출구를 찾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만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켄 가이어가 쓴 ‘영혼의 창’이라는 책에 ‘여기 있다 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으냐. 내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내 모든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싶으냐. 여기 있다 보라.”
인생을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자신 있게 보여줄 그것이 무엇일까.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수가성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 그녀는 뜨거운 정오에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러 나왔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후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가서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고 외친다. 그 여인은 켄 가이어가 말한 것처럼 “우리 인생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하고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 줄 사람을 내가 만났다”고 말한다.
교회가 할 일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엄청난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조차 힘든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교회는 “여기 있다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날마다 믿는 자들의 수는 늘어났다. 그것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성령의 충만함’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쫓아가는 교회는 절대로 답을 줄 수 없다. 오직 복음의 능력과 성령 충만함을 소유한 교회만이 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여기 있다 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바란다.
이창교 목사 (창원 상남교회)
[시온의 소리-이창교] 여기 있다 보라
입력 2015-10-22 20:17 수정 2015-10-22 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