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부희령] 성벽과 해자

입력 2015-10-22 18:58

오래 전에 ‘소름’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의 내용은 거의 잊었지만 남녀 주인공이 싸구려 여관방에서 말다툼을 하는 장면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문제의 장면은 편집 없이, 장면의 전환 없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남자는 고아이고 그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사는 사람이다. 여자는 어린 아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기억과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피해의식과 불행한 기억은 두 사람을 묶어주지만, 서로를 파괴하기도 한다.

사소한 시비로 말다툼이 시작되고, 두 사람은 서로가 하는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한다. 두 사람은 상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듣기는 듣되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릴 뿐이다.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 남자에게는 여자가 하는 모든 말이 고아인 자신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조롱처럼 들린다. 여자 또한 남자가 하는 말은 모두 자식을 놓쳐버린 것에 대한 비난과 질책이라고 여긴다.

둘 다 상대방이 하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다. 아무도 듣지 않는 자기변명만을 되풀이한다. 변명이란 누군가가 납득할 때 비로소 그칠 수 있는 운명이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변명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기 귀에도 들리지 않고, 자신에게도 납득되지 않을 말일지 모른다.

영화 속 남녀 주인공처럼 깊고 치명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행복하지 않은 기억에서 비롯된 피해의식, 죄책감 같은 상처나 결핍이 있다. 나의 상처와 결핍은 내 주위에 성벽을 쌓고 해자를 판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성벽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이나 돌멩이로 보인다. 바람에 실려 오는 나뭇잎이나 깃털도 마찬가지다.

이웃은 사랑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존재다. 성벽은 높아지고 해자는 깊어진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이따금 성벽 위에 올라가 소리 높여 외치고 싶다. 나는 상처 입었어요. 모두 당신들 탓이에요. 내 말이 들리지 않아요? 물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부희령(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