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의 동상이몽은 20일(현지시간) 웨스트민스터에서 행해진 중국 국가주석 최초의 의회 연설에서부터 역력히 드러났다. 연설에 앞서 존 버커우 하원의장은 “이곳은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가 연설한 곳”이라며 “그녀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국의 행동은 전 세계가 지켜본다”며 “중국이 강대국이 아니라 도덕적 영감을 주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고 주문했다. 이는 시 주석 면전에서 ‘중국이 민주적이지 않고 인권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인 듯 시 주석이 연설하는 11분 동안 의사당 안은 내내 썰렁했다. 시 주석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중국군 24명이 영국 유학 도중 참전했다는 언급까지 하며 “양국 우호의 역사가 깊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한 번도 박수가 없었다. 연설을 마친 뒤 기대된 기립박수조차 나오지 않았다.
박수는커녕 시 주석의 중국어 연설 도중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동시통역기를 착용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일간 가디언은 “총리가 벼락치기로 중국어를 공부했나”라고 꼬집으며 총리조차도 시 주석 연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현지 언론의 평가도 인색해 일간 텔레그래프는 “상투적 연설이었다”고 비판했고, 파이낸셜타임스도 한 외교 관계자를 인용해 “완벽하게 무의미한 연설이었다”고 혹평했다. 시 주석은 연설 때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 속 대사인 “과거는 서막에 불과하다”는 말을 인용했으나 텔레그래프는 “이 대사는 등장인물이 살인을 부추길 때 쓴 말로 이상한 인용”이라고 보도했다.
이날 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주최로 열린 국빈 만찬에는 찰스 왕세자가 불참해 빛이 바랬다. 대신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가 참석했다. 빨간색 드레스 차림의 미들턴은 여왕의 모친이 소유했던 다이아몬드 왕관을 쓰고 시 주석 바로 옆에 앉아 이목을 끌었다. 만찬에는 사슴 허릿살 요리가 등장했고 비틀스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시 주석은 21일에는 캐머런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300억 파운드(약 54조원) 규모의 투자 협력방안 등 양국 간 역대 최대규모 경협에 합의했다. 영국 남부 서머싯주에 힌클리 원전을 건설 중인 프랑스 에너지회사 EDF는 이날 중국광핵그룹(CGN)이 전체 건설비용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60억 파운드(약 10조5352억원)를 투자하기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BBC방송 등이 전했다. 힌클리 원전은 2025년 가동될 예정이다. CGN은 또 영국 서퍽 카운티 시즈웰 원전 프로젝트에서 지분 20%를 투자키로 했으며, 에식스주 브래드웰 원전 프로젝트에는 66.5% 지분으로 프로젝트를 주도하기로 했다. 영국은 중국인에 대한 비자 규제를 대폭 풀었다.
AP통신은 그러나 “시 주석이 어딜 갈 때마다 인권 운동가, 환경 운동가, 티베트인 등이 끊임없이 시위를 벌였고 ‘셰임’(Shame·창피한 줄 알아라)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고 전했다. 캐머런 총리의 전략가였던 스티브 힐튼 전 총리실 고문도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영국은 러시아만큼이나 나쁜 국가인 중국에 레드카펫을 깔아줄 게 아니라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비난했다.
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