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中 ‘동상이몽’… 시진핑 의회연설도 썰렁

입력 2015-10-21 21:51
20일(현지시간) 영국 국회의사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의회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동시통역기를 착용하지 않고 있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오른쪽)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돼 ‘시 주석의 연설을 신경조차 안 쓴 것 아니냐’는 구설에 올랐다. BBC방송
영국을 국빈 방문 중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부인 펑리위안 여사(왼쪽 두 번째)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공 부부와 함께 20일(현지시간) 런던 버킹엄궁에서 열린 환영 국빈만찬장에 입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날 만찬에서 시 주석이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와 건배하는 모습. AP연합뉴스
국빈 방문 중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영국이 황금마차까지 동원해 극진히 환대했지만 실제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중국은 양국 관계를 ‘황금시대의 도래’ ‘새로운 비상’ 등으로 치켜세웠지만, 정작 영국은 중국의 ‘돈’만 바라볼 뿐 진정어린 파트너십을 구축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를 두고 AP통신은 “두 나라가 글로벌 시장에서 점점 라이벌 관계가 돼 가고 있고, 인권 문제와 국제 안보 이슈에서도 시각차가 현격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양국의 동상이몽은 20일(현지시간) 웨스트민스터에서 행해진 중국 국가주석 최초의 의회 연설에서부터 역력히 드러났다. 연설에 앞서 존 버커우 하원의장은 “이곳은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가 연설한 곳”이라며 “그녀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국의 행동은 전 세계가 지켜본다”며 “중국이 강대국이 아니라 도덕적 영감을 주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고 주문했다. 이는 시 주석 면전에서 ‘중국이 민주적이지 않고 인권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인 듯 시 주석이 연설하는 11분 동안 의사당 안은 내내 썰렁했다. 시 주석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중국군 24명이 영국 유학 도중 참전했다는 언급까지 하며 “양국 우호의 역사가 깊다”고 여러 번 강조했지만 한 번도 박수가 없었다. 연설을 마친 뒤 기대된 기립박수조차 나오지 않았다.

박수는커녕 시 주석의 중국어 연설 도중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동시통역기를 착용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일간 가디언은 “총리가 벼락치기로 중국어를 공부했나”라고 꼬집으며 총리조차도 시 주석 연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현지 언론의 평가도 인색해 일간 텔레그래프는 “상투적 연설이었다”고 비판했고, 파이낸셜타임스도 한 외교 관계자를 인용해 “완벽하게 무의미한 연설이었다”고 혹평했다. 시 주석은 연설 때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 속 대사인 “과거는 서막에 불과하다”는 말을 인용했으나 텔레그래프는 “이 대사는 등장인물이 살인을 부추길 때 쓴 말로 이상한 인용”이라고 보도했다.

반면 중국 관영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는 “한층 격상된 양국 관계는 앞으로 중국-서방 간에 모종의 모범적인 정치관계가 형성될 것임을 예고한다”고 자화자찬했다. 제1야당인 노동당 제러미 코빈 당수는 이날 버킹엄궁에서 시 주석을 만나 민감한 중국의 인권 문제를 거론했다. 코빈은 또 값싼 중국산 철강 때문에 자국 철강산업이 타격을 받고 있다는 업계의 불만도 전달했다.

이날 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주최로 열린 국빈 만찬에는 찰스 왕세자가 불참해 빛이 바랬다. 대신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가 참석했다. 빨간색 드레스 차림의 미들턴은 여왕의 모친이 소유했던 다이아몬드 왕관을 쓰고 시 주석 바로 옆에 앉아 이목을 끌었다. 만찬에는 사슴 허릿살 요리가 등장했고 비틀스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시 주석은 21일에는 캐머런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300억 파운드(약 54조원) 규모의 투자 협력방안 등 양국 간 역대 최대규모 경협에 합의했다. 특히 영국 내 원자력발전 건설 사업에 중국이 30∼40% 지분을 투자키로 했다. 영국은 중국인에 대한 비자 규제를 대폭 풀었다.

AP통신은 그러나 “시 주석이 어딜 갈 때마다 인권 운동가, 환경 운동가, 티베트인 등이 끊임없이 시위를 벌였고 ‘셰임’(Shame·창피한 줄 알아라)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고 전했다. 캐머런 총리의 전략가였던 스티브 힐튼 전 총리실 고문도 BBC방송과 인터뷰에서 “영국은 러시아만큼이나 나쁜 국가인 중국에 레드카펫을 깔아줄 게 아니라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비난했다.

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