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장하석의 과학, 박근혜의 역사

입력 2015-10-21 18:28

초등학생 남매가 같은 학교에 다녔다. 교내 글짓기대회가 열렸는데 주제는 ‘우리 집 강아지’였다. 동생이 써낸 글을 보고 선생님이 말했다. “네 누나가 쓴 글이랑 토씨까지 똑같잖아. 누나 거 베꼈지!” 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같은 개라서 그래요.”

장하석 케임브리지대학 석좌교수는 지난해 펴낸 책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에서 이 농담을 소개했다. 과학자들이 종종 저 아이와 같은 오류에 빠진다고 했다. 한 마리 개를 놓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한 가지뿐이라 생각한 아이처럼, 하나인 우주를 설명하는 ‘올바른’ 이론은 한 가지라고 여긴다는 뜻이다. 그는 “과학에 절대적 지식이란 없다”고 말한다.

이 과학철학자가 과학에 던진 철학적 질문은 이랬다. ‘온도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맨 처음 온도계를 만든 과학자는 그 온도계가 정확한지 검증해야 했을 텐데. 그러려면 무엇이 정확한 온도인지 알아야 했을 텐데. 정확한 온도계 없이 정확한 온도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온도를 측정하기 위해선 뭔가 기준점이 필요했다. 17∼18세기 과학자들이 생각해낸 방법은 서른 가지쯤 된다. 버터가 녹는 점, 왁스가 굳는 점, 피가 따뜻한 정도, 깊은 지하실이 서늘한 정도…. 여러 가설이 수십년 경쟁한 끝에 물이 어는점을 0도, 끓는점을 100도로 설정한 온도계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지금 과학시간에 ‘순수한 물은 1기압 하에서 섭씨 100도에 끓는다’고 배우고 있다. 정말 그런지, 장 교수는 물을 끓여봤다. 화학과 실험실을 빌려 ‘물 끓이는 철학자’란 별명이 붙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끓였다. 그랬더니 유리그릇에선 101도, 양은냄비에선 97도, 머그잔에선 102도에서 물이 끓었다. 훨씬 더 높은 온도까지 끓는점이 올라가기도 했다.

물은 일정한 온도에서 끓는다는 걸 전제로 200년 이상 연구해 오늘날 정확한 온도계가 만들어졌는데, 그 온도계로 재보니 물은 일정한 온도에서 끓지 않고 있었다. 서른 가지 가설과 경쟁해 승리한 이론도 결국 ‘절대적으로 올바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럼 지금 우리가 맞다고 믿고 있는 것들은? 과연 미래에도 모두 정답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장 교수는 ‘물=H2O’처럼 상식이 돼 있는 여러 과학적 사실에서 “과연 그런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화학혁명이 일어난 18세기 말, 종이가 탈 때 나오는 불꽃은 산소가 결합한 결과라는 ‘산소 이론’과 종이에 들어 있는 어떤 물질(이를 플로지스톤이라 불렀다)이 빠져나온 것이라는 ‘플로지스톤 이론’이 충돌했다. 장 교수는 산소 이론이 플로지스톤 이론을 “틀렸다”고 몰아붙여 없애버리지 않았다면, 함께 존속해 연구됐다면 화학이 더 멋지게 발전했을 거라고 아쉬워한다(산소란 기체도 플로지스톤 이론을 통해 발견한 거였다).

내비게이션은 인공위성이 원자시계를 돌려 보내주는 GPS 신호를 받는다. 위성을 조종하는 원리는 뉴턴역학이지만, 원자시계를 작동하는 건 양자역학이고, 그 원자시계가 지구 중력장에서 받는 간섭은 상대성이론으로 제어한다. 17세기 고전역학과 그 허점을 지적하며 발전한 21세기 첨단 물리학이 힘을 합쳐 운전자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자연의 법칙을 다루는 과학에도 ‘다원주의’가 필요하다는 연구로 이 젊은 한국인은 케임브리지대학의 과학철학 기조를 좌우하는 자리에 섰다. 정부는 지금 인간의 삶을 다루는 역사를 놓고 ‘하나의 올바른 지식’을 만들려 한다. 한국사 국정 교과서가 집필되면 그 책에는 역사를 보는 어떤 세계관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것이 틀렸다 말할 수 없다. 관점은 같거나 다른 것이고, 틀린 것은 그런 세계관이 하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태원준 사회부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