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흥우] 수정실록

입력 2015-10-21 18:29

인조 원년(1623년) 특진관(特進官·경연에 참석해 왕의 고문에 응하던 관직) 이수광 이정귀 임숙영은 임금에게 광해군 시절 편찬된 선조실록 수정을 주청한다. 실록이 적신(賊臣)의 손에 의해 편찬됐다는 이유에서다. 이이첨 등 광해군 시절 정권을 잡은 대북파 주도로 편찬된 선조실록은 대북파에 대해선 칭찬 일색인 반면 다른 당파는 가차 없이 깎아내려 편찬 당시부터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반정으로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 등은 가장 먼저 자신들을 폄하한 실록부터 고치려고 했다. 하지만 수정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병자년과 정묘년의 잇따른 호란과 책임자 교체 등 숱한 우여곡절 끝에 무려 44년 만인 효종 8년(1657년)에 가서야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사가들은 선조수정실록이 없었다면 충무공의 불패신화를 지금처럼 자세히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원실록과 수정실록의 두드러진 차이는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평가다. 유성룡의 경우 원실록에는 “왜와 강화를 주장하고 근친(覲親) 중에 술을 마셨다”는 등 부정적으로 묘사돼 있으나 수정실록에선 “학행과 효우(孝友)가 있었고 부친의 간병을 극진히 했다”고 ‘명예회복’을 했다. 이이첨은 ‘천성이 영특하고 기개가 있는 사람’에서 ‘간적의 괴수’가 됐다. 이런 식으로 두 실록에서 평가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인물이 40명이나 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조수정실록 외에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 ‘경종수정실록’, 네 차례 실록 수정이 있었다. 당쟁이 격화된 선조 이후의 일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승자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다. 소론 주도로 편찬된 경종실록은 노론의 반발로 개수됐다. 집권세력이 바뀌면 역사의 기록 또한 바뀌었지만 우리 조상들은 ‘사실을 왜곡시킨 역사’라면서도 원실록을 없애지 않았다. 해석을 후세에 맡긴 것이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