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과학정상회의가 대전에서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동남아국가연합(ASEAN) 57개 회원국의 과학기술 장차관과 12개 국제기구 수장이 참석한 초대형 국제회의다. 기후변화·사회격차·저성장·질병확산 등 글로벌 문제의 해결과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한 과학기술 혁신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이다. 연구 자율성, 국제협력, 전문인력 양성교육의 중요성이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고 한다.
화려한 잔치를 지켜보는 우리 과학계의 마음이 도무지 편치 않다. 그렇지 않아도 이웃 일본과 중국의 노벨상 잔치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형편이다. 18조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하고, 노벨상을 위해 필요하다는 기초과학연구원까지 만들어줬는데 도대체 무얼 했느냐는 따가운 질책이 쏟아지고 있다. 연구·개발(R&D)에 대한 투자의 국내총생산(GDP) 비중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국제협력과 논문의 영향력은 OECD 평균에 크게 뒤진다는 지적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릴 수밖에 없다.
우리 과학계가 게으르고 무능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지난 반세기 동안 국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으로 엄청난 성과를 이룩했다. 비록 남의 것을 베끼기는 했지만 어쨌든 세계가 놀라는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주역이 바로 우리 과학계였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역설적이지만 모방형 과학기술에 의한 경제성장이 오히려 과학계에 독약이 돼버렸다. 경제성장으로 힘을 얻은 관료와 기업이 과학계에 등을 돌려버렸다. 이제 우리 과학계는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성공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주역이 아니다. 추격형의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미래를 위한 혁신을 거부하고, 연구윤리조차 지키지 못하는 타락한 집단으로 전락해버렸다.
과학계의 현실은 참혹하다. 연구비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 연구비는 관료와의 거리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기초’와 ‘응용’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전공분야들이 갈가리 찢어져 반목한다.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노벨상 시즌에 반짝했다가 떨어져 짓밟히는 낙엽처럼 허무하다. 오히려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배부른 꿈은 접어야 한다는 실용주의자들의 당당한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오늘날 우리 과학계는 관료와 정책전문가들이 선진국을 어설프게 흉내 내서 만들어놓은 생태계에 갇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버린 ‘길 잃은 양떼’가 돼버렸다. 스스로 연구과제를 선택하는 능력도 잃어버렸다. 선진국의 낯선 제도와 화려한 혁신의 구호 속에서 선진·창조형 성과를 쏟아내라는 관료주의적 강요에 허덕이고 있다.
박인비를 배워야 한다. 박인비도 레드베터와 하먼의 세계적인 골프 아카데미에서 모방형으로 출발했다. 7년 동안의 노력으로 최연소 US 오픈 우승의 대기록도 달성했다. 그것이 한계였다.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던 박인비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것은 평범한 국내 프로선수 출신의 약혼자였다. 그들의 전략은 모방형 스윙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었다. 박인비의 독특한 체형을 장점으로 승화시킨 독창적인 스윙을 개발했다. 오늘날 박인비를 골프의 ‘여제’로 우뚝 서게 만든 것은 세계적인 골프 아카데미의 교과서적 스윙이 아니었다.
남의 제도·정책을 흉내 내서 선진·창조형 퍼스트 무버가 되겠다는 꿈은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켜줄 우리만의 독창적인 제도와 정책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노벨상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과학자가 과학기술 정책의 중심에 서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세계과학정상회의에서 강조하는 연구의 자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이덕환(서강대 교수·자연과학부)
[시사풍향계-이덕환] 박인비를 배워야 노벨상이 보인다
입력 2015-10-21 1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