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열린책들이 ‘어린 왕자’를 출간했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은 이미 100여종에 이른다고 한다. 출판사는 또 하나의 번역본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황현산’(사진)을 내세웠다. 책 띠지에 ‘문학 평론가 황현산이 옮긴, 전 세계가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적었다. 보도자료 역시 황현산으로 시작된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번역으로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여러 번역본이 존재하는 가운데 새로 번역본을 추가하면서 번역자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불가피한 전략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황현산은 이례적이다. ‘황현산 번역’이란 설명이 종종 ‘한국어 결정판’이라는 규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열린책들은 황현산 번역을 알리면서 “국내에 출간된 많은 ‘어린 왕자’ 중에서도 특히 원전의 가치를 충실히 살린 한국어 결정판을 마련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8월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이 출간됐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시집 역시 이미 여러 번역본이 존재하는데, 황현산 번역으로 출간되자 꽤 큰 화제가 됐다. 특히 책 뒤에 수록된, 책 분량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황현산이 쓴 ‘주해’가 본문 이상으로 관심을 끌었다.
문학동네에 따르면 ‘파리의 우울’은 지금까지 3개월 동안에 6000부를 찍었다. 해외 시집, 그것도 꽤나 어려운 프랑스 시집이 이만큼 팔린 것은 근래 없었던 일이다. 한 출판사 대표는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이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이 팔린 경우는 프랑스를 포함해도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고 놀라워했다. 이 책을 담당한 편집자 최민유씨는 “시집이 나가는 속도를 보건대 조만간 또 증쇄를 할 수도 있다”며 “이런 현상은 황현산이라는 이름을 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요즘 문학계에서 황현산은 하나의 현상으로써 존재한다. 2013년 ‘밤이 선생이다’라는 그의 에세이집이 출간되기 전까지만 해도 황현산은 불문학자이자 번역가, 문학비평가로서 성실하게 활동해왔지만 대중들에겐 무명에 가까웠다. 고려대 불문과 교수로 정년퇴직한 뒤 발표한 ‘밤이 선생이다’는 독자들이 황현산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황현산은 ‘밤이 선생이다’ 서문에서 “문학에 관한 논문이나 문학비평이 아닌 글로는 내가 처음 엮는 책”이라며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밤이 선생이다’는 시인이자 난다 출판사 대표인 김민정씨가 황현산에게 퇴임 선물로 주려고 만든 책이었다. 그 책이 지금까지 중쇄를 거듭해 19쇄에 이르렀고, 4만5000부 넘게 판매됐다. 김 대표는 “황 선생님은 뇌가 젊고, 마음이 젊고, 감각이 젊다”며 “문장도 비유가 탁월한 데다 쉽게 쓰면서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게 독자들에게 동조를 일으키게 만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황현산은 최근 대장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 조만간 칼럼집이 나올 예정이고, 번역을 주제로 한 에세이집 출간도 예정돼 있다. 아폴리네르 시집도 번역 중이다. 국내 처음 선보이는 ‘보들레르 전집’도 맡았다. 70세 노인 황현산은 지금 한창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 황현산, 하나의 현상이 되다… “그의 번역이라면 특별하다”
입력 2015-10-22 21:06